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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세월의 향기
사회

세월의 향기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6/03/24 00:00 수정 2006.03.24 00:00

봄이다.

새로 오신 김 선생님. 같은 부서에 마주 앉게 된 인연으로 나에게 난초 분 하나를 건네주신다.  사흘에 한 번씩은 물을 주라는 말을 새겨들었지만 금새 잊어버리고 벌써 삼 주가 지났다.

아차, 난초!  그 동안 물 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는데 돌아보니 난초는 좀 더 자란듯하기도 하고 제법 생기가 넘친다. 괜히 난초 분을 주어 짐스럽게 하였다고 너털웃음을 짓는 김 선생님.  나 대신 난초에 물을 주신 모양이다.  김 선생님과 난초에게 나의 무심함이 미안하다.

김 선생님은 천리향의 향기를 맡아보라며 다시 작은 화분을 건네준다. 시장에서 만원 주고 샀다 하신다.

천리향의 냄새. 다시 라벤다의 향기를 맡기 위해 부채질하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온다.  건너편에 있는 그의 책상은 작은 화단이다. 30년이 넘는 교육 경력으로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을 연륜을 가진 그와 마주 앉게 된 건 행운이다.

아직 나는 난초보다 사람에 관심이 더 많다. 가만히 난초를 들여다본다. 난초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세상이 잠시 고요해진다. 밖에서 아이들 가위바위보 하는 소리.  저맘때는 가위바위보로 자신의 영역을 넓힌다.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에는 폭압이 없다.
손가락 다섯으로 결정하는 세상.
세상의 넓이.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하고 그 순서에 굴복하고  가위바위보로 계단을 오르고 그 높이에 굴복하고 , 가위바위보로 술래를 정하고, 그 역할에 굴복하고. 그 굴복에는 모욕과 수치가 없다. 권위도 억압도 없는 가위바위보여.
이 봄날의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아쉬움과 탄성이 엇갈리는 가위바위보.

어른이 되면 좀처럼 가위바위보를 하지 않을 테지. 어른들이여, 우리도 가끔은 곤란한 일을 가위바위보로 결정해 보자. 그 결정이 아쉽지만 기꺼이 한번 따라보자.

오늘, 가위바위보 한번 해 보시면 어떨지?

난초와 가위바위보가 오버랩 되는 점심시간, 나는 김 선생님에게서 나태주의 난초를 읽는다.
 
 알으켜 주지 않고
 귀띔해 주지 않아도
 난초는
 
 어디로 이파리를 뻗어야 하고
 어떻게 꽃을 피워야 좋은지를
 안다
 
 아무렇게나 이파리를 뻗어도
 멋스럽고
 아무렇게나 꽃을 피워도
 어여쁜 난초
 
 그는 이제 스스로
 법이요 길이다. 
    나태주, <난초> 전문

 
"아무렇게나 이파리를 뻗어도/ 멋스럽고 /아무렇게나 꽃을 피워도 /어여쁜 난초"는 이순(耳順)을 지나고 종심(從心)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세월만큼 향기를 가진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배정희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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