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년의 <다정가(多情歌)> 전문
시골 살아도 배꽃 본 아이가 열에 하나가, 은하수는 백에 한둘이 드물다. 소쩍새 울음소리 들은 사람은 아예 없다. 자정 훨씬 넘어 자는 아이들에게 자정이 가장 깊은 밤이라는 것 이해시키는 일 또한 만만치 않지만 상상력을 빌려와 본다.저녁 일곱 시쯤 어두워져 잠자리에 들었다. 일지춘심(一枝春心)이라더니 꽃피는 봄 맘이라 누워서도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리기만 하는데 어디서 소쩍새 울음소리만 피나게 울린다. 얼마를 뒤척였을까. 칠흑 같은 어둠이 걷히며 창문이 훤해진다. 그렇구나. 하현달이 뜰 시간이구나.밖에 나오니 달빛이 배꽃가지에 하얗게 부서지고 있다. 서편으로 기운 은하수를 보니 밤은 이미 깊을 대로 깊은 삼경이다. 성리학을 하는 근엄한 선비 역시 사람이라 사랑의 열병으로 잠 못 들어 깊은 밤 뜰에 나서 홀로 서성이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 머리 희끗희끗한 선생님들이 파릇파릇한 봄이 오면 곧잘 '사는 것 참 잠깐이다. 봄꿈 한 자락 잠시 꿈꾼 것 같은데 머리에 서리가 이리 내렸구나' 했었다. 피천득도 수필에서 '새댁이 시집와서 김장 서른 번만 담그면 할머니가 되는 것이 인생'이라 했다. "입학한 것이 돌아보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2학년이잖아. 1년 금방 갔지?"
"네, 그래요"
"우리 학교에 멋있는 남학생 많지?"
"아뇨, 없어요"
"이쁜 여학생 많지?"
"우 웩"
"하하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지. 고등학생 커플은 눈꼴시지만 환타지아 찾는 대학생 연인들은 좀 부럽지? 하하, 그래, 알았어. 그런데 엄마, 아버지가 아직도 연인 같아 보이는 사람? 없어?"
"소 닭 보듯 하는데요"
"적과의 동거는 아니고? 어! 몇 사람 고개 끄덕이네. 그런 부모님들도 결혼할 때는 다 사랑해서 했겠지? 그때는 누구나 다정한 연인이었는데, 죽고 못 살던 사이였는데 세월에 깎이면서 그렇게 된 거야. 벚꽃 서른 번만 피면 우리도 싫든 좋든 엄마 아버지 나이가 되는 게 인생이야"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白髮) 막대로 치려 터니, /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우탁의 <탄로가(歎老歌)> 전문
"이 시조 읽으면서 늙음과 삶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니 내가 지금까지와는 조금은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니?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 다르겠지만"
"그건 그렇다 쳐요. 하지만 이 시조 다 옛날 말이네요. 요즘이야 가시나 막대기가 뭐 땜에 필요해요. 보톡스 주사 한 방 맞고 염색하면 그만인데"
"하하. 그렇다 치자고 하니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주사 맞고 염색한다고 다시 젊어지는 건 아니잖아. 젊어 보이게 '분장'한 거지"
황사에 꽃샘추위가 매섭지만 봄은 벌써 이곳저곳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아파트에서 나오는 복사열 때문일까. 아파트 쪽으로 벋은 벚나무 북쪽 가지에만 튀겨지다 만 옥수수튀밥처럼 벚꽃이 벌고 있다. 매화, 동백, 진달래, 개나리, 목련은 물론 살펴보면 마른 풀 사이로 벼룩이자리꽃, 개별꽃, 쇠별꽃, 노루귀, 제비꽃도 수줍게 숨어 핀 것들 보인다.꽃봉오리 같은 아이들. 일지춘심(一枝春心)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게 술렁이며 피어난다.문학철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