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남 씨의 등단 소식을 듣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가는 길에도 벚꽃이 눈부시게 피어 있었다. 지천명의 나이에 시를 쓰겠다는 용기도 용기이지만, 마음 내어 준 시에 대한 애정으로 조용하고 단단하게 공부를 계속하는 그녀를 보면,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저런 것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좋은 친구들인 <시담회> 동인들이 그녀의 등단을 한없이 축하해 주고, 수줍은 표정의 그녀가 나지막이 수상 소감을 읽는다. “오래 생각하고, 오래 사귀고, 오래 머물고 오래 기다리고, 오래 지치고, 내가 읽은 ‘오래’라는 단어 속에는 ‘자신과 싸워 이겨야 한다’라고 쓰여 있다. 시도 나에게는 그랬다”라는 그녀의 수상소감은 그녀의 모습이 그대로 배어있다. 국립박물관 뜨락에 달빛 환하다
읽던 시집 102쪽 달콤한 문장 한 줄
붉은 연필로 밑줄 긋는다, 나는 생리중이다
내 몸 속 향기로운 피 뜨거워지고
닫힌 문 열리며 붉은 꽃이 핀다
둥근 달을 황금 굴렁쇠처럼 굴리며
나는 만삭의 여자가 되고 싶었으나
마흔 이후 나는 내 몸을 파먹고 산다
저 꽃이 지고 나면 자궁은 가벼워지고
엉덩이는 무거워 질 것이다
달은 아직까지 밝다, 밑줄 친 문장에서
문득 서라벌의 밤꽃 냄새가 난다
오늘 밤 달이 다녀간 방마다
당신도 밤꽃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박물관 뜨락에 혼자 서 있는 금강역사
잠시 달빛이 유혹처럼 내려앉자
우락부락한 얼굴에도 색이 돈다
쉿! 당신의 호흡은 여기까지다
곧 개기월식이 시작될 것이다
―정경남, <개기월식> 전편여자는 흔히 꽃에 비유된다. 마흔 이후의 여자는 더 이상 꽃 피우지 못하는 것일까? 마흔 이후의 여자, 여기서는 더 이상 생산적이지 못한 나이로 설정된 마흔이다. 그러나 마흔이 넘은 여자도 시집을 읽고, 달콤함을 느끼며, 생리를 한다. 피는 뜨겁고 붉은 꽃을 피운다. 그리고 여자는 둥근달을 황금 굴렁쇠처럼 굴리며 만삭의 여자가 되고 싶은 꿈을 꾸고, 우락부락한 금강역사의 ‘색’을 돌게 만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녀가 읽는 문장 속에서, 혹은 마음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실제 화자는 ‘내 몸을 파먹고 사는’ 마흔이 넘은 여자인 것이다. 화자는 “저 꽃이 지고 나면 자궁은 가벼워지고/ 엉덩이는 무거워 질 것이다”라고 안타까워한다. 저 꽃이 지고 나면,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 가고 나면 그 허망함이, 그 안타까움이 깜깜한 개기월식 같으리라.청춘의 꽃은 지는데 강산의 꽃은 만발하니, 이보소 벗님네들! 꽃구경 갑시다.배정희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