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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사이에 대하여
사회

사이에 대하여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6/05/26 00:00 수정 2006.05.26 00:00

말하기 시간. 내용 자유, 형식 자유.

한 녀석이 매점 아줌마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며 천연덕스럽게 슬픈 표정을 지으며 우울한 어조로 "매점 아줌마의 얼굴은 늘 슬프고 우울하다"로 말을 시작한다. 그러자 아이들의 박장대소. 다른 녀석들이 연대감을 가지고 여기저기서 불만을 터뜨린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10분간의 휴식 시간에 벌떼처럼 밀려오는, 입맛도 가지가지인 녀석들의 요구를 일일이 다 들어주려면 웃는 얼굴 다정하게 맞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간 느려 터져서 제대로 사지도 못했다고 야단들일 게 뻔하다.

이런 사정이니 누가 매점에 앉아 있던, 거기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매점 아줌마와 시간을 갖고 일대 일로 만나 보라. 그녀는 결코 슬프고 우울한 여인이 아니다.
후덕한 웃음으로 먼저 인사를 건네는 마음씨 좋은 아줌마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입장 바꾸기’의 미덕을 호소하며 매점 아줌마에 대한 변론을 마무리 짓는다.

사이라는 것, 관계라는 것, 이해 안 하려고 들면 어찌 메워질 수 있겠는가. 멀고 가까움을 떠나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그 사일 메워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건 결코 거창한 휴머니즘이 아니다.

통일호 열차 안의 옆자리/ 신문을 읽고 있는 신사분의 발에/ 수압을 견디지 못한 말이 몇 번이고 뛰쳐나올 뻔했다/ 옆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미워해야 한다는 것만큼 먹먹한 일도 없을 것이다/ 진실은 포장되지 않은 상태로 온다고 하지만/ 진실도 진실 나름/ 그러나 이 표정 굳은 생각은 왜관을 지나면서/ 달라졌다 내 코가 발꼬랑내에 그렇게/ 절어가는 것도 신기했다/ 세상을 감각 끝에서 맡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상황 쪽으로 풀어놓는 일/ 그걸 중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마는/ 중독도 중독 나름/ 나는 그 신사의 발냄새가 친숙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세상과 내 코 사이에 향술 뿌려놓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껴안으려기보다는 떨어져 있으려는/ 내 자세가 문제였을 것이다/ 발냄새처럼은 아닐지라도/ 서로가 뿜어내는 흐뭇하고 끈적한 기운 같은 게/ 사일 메워야 한다는 실감/ 이번에는 코끝에서가 아니라/ 살갗 사이에서 돋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구두를 벗기 시작했다//
-손진은, <사이에 대하여> 전문

누구나 한번쯤 해 보았을 경험을 쓴 시다. 버스를 타면 ‘신발을 벗지 마시오’라고 써 붙여 놓은 건 이러한 일 때문이겠지.

밀폐된 공간에서의 발 냄새!(지독한 고문, 분노, 적개심 등등 오만가지 감정의 비빔밥) 그러면서도 좀 더 참아보자고, 급기야 후각이 마비될 때까지의 은근과 끈기. 그러나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신발 주인.

"수압을 견디지 못하는 말"이라는 표현은 참 적절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껴안으려기보다는 떨어져 있으려는/ 내 자세가 문제였을 것이다"라고. 참으로 거룩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나는 손 시인을 좀 알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말을 주저 없이 쓴다. 그는 정말 이와 같은 심성을 가진 시인이다. 같이 구두를 벗지 않으면, 내가 한 꺼풀 벗지 않으면, 우리 사이가 어찌 가까워 지리요. "서로가 뿜어내는 흐뭇하고 끈적한 기운 같은 게/ 사일 메워야 한다는 실감"을 주는 시이다.

배정희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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