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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6/06/02 00:00 수정 2006.06.02 00:00

서울 살며 아직도 보따리강의를 겸직하는 차공이 더 늙어지면 돌아가겠다며 고향 마을에 농막을 마련했다고 했다. 고향에서 학교 다닐 때 늘 소풍가던 백화산 자락 중심이다. 불알친구들 모임을 거기서 했다.

옥봉 정자가 건너 보이는 신덕 마을로 들어서며 보니 신록에 싸인 몇 채 집이 한가롭다. 마을은 삼태기 두 개를 붙여 놓은 뒤 그 앞을 깔때기로 모아 놓은 것 같은 용초 계곡을 오른쪽으로 끼고 있다. 그리고 분지 저 멀리서부터 모아온 물줄기가 휘돌아 석천(石川)을 이루어 해발 900미터가 넘는 백화산을 갈라 내려가는 입구에 있다.

마을 앞에는 큰 나무를 세워놓은 것 같은 형상의 수봉이 병풍처럼 솟아 있다. 그 수봉에서 뻗어 내려온 산자락 한 줄기가 용머리처럼 솟아 석천이 소용돌이치며 소를 이룬 그 머리에 낡은 기와를 인 옥봉 정자가 정겹다. 휘돌아가는 물줄기와 산줄기가 어우러진 속으로 들어서려니 지금도 즐겨 읽는 무협지 속의 세계로 내가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소나기는 삼형제라더니 천둥 번개를 동반한 봄 소나기가 두어 시간 간격을 두고 세 차례 째 붓고 갔다. 자정 가까워진 시간. 금돌성이 있는 백화산 용초 계곡 불어난 물소리와 농막으로 지어놓은 천막에 후드득거리며 지나가는 남은 빗소리에 섞여 소쩍새 소리, 개구리 소리가 크고 작은 투명한 공으로 굴러 내렸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 밭이 한참 갈이 / 괭이로 파고 / 호미론 김을 매지요. //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 강냉이가 익걸랑 / 함께 와 자셔도 좋소. // 왜 사냐건 / 웃지요.
-김상용의 <남(南)으로 창을 내겠소> 전문
자정 넘기며 어탕국수를 벌레 먹은 자국이 숭숭한 배춧잎에 쌈 싸 먹는데 나이 쉰에 대학원 등록한 신공이 농막에 붙어 서 있는 키 큰 재래종 뽕나무에서 따왔다며 뽕잎을 한 줌 내놓는다. ‘먹어도 되는 거야’하며 상추쌈에 넣어 먹는다. 그래, 소가 먹는 건 사람도 다 먹을 수 있다더라 하며 너도나도 뽕잎을 먹어 본다.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 낡은 기와집. // 산은 자하산(紫霞山) / 봄눈 녹으면, // 느릅나무 /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구비를 // 청노루 / 맑은 눈에 // 도는 / 구름
-박목월의 <청노루> 전문

녀석, 역시 많이 심심했던 모양이다. 건너편 산자락을 타닥타닥 달려 내려온다. 마주 내려가는 내 걸음도 더 가벼워진다.

도랑을 건너 녀석에게 조금 걸음을 늦추며 다가섰더니, 어라, 청노루 녀석 역시 걸음을 늦추고 있다. 녀석이 턱 밑까지 다가와 몸 비비려다말고 빤히 올려다본다. 맑은 눈 속에 흰 구름 한 조각 한가롭게 비친다. 내가 묻혔던 바깥 냄새가 다 아직 씻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에이, 이 냄새 싫어’ 녀석 눈길이 하늘로 옮아가며 눈 속에 비친 흰구름이 크게 돌아간다.

그 아찔한 하늘 속으로 빨려 떨어지다 그만 눈을 떴다. 천막 틈으로 새어드는 아침햇살이 낯설다. 여기가 어딜까? 얼굴을 쓰다듬어보니 손 가득 잡히던 흰 수염이 간 곳 없다. 불어난 물소리에 섞여 이골저골 굴러 떨어지는 뻐꾸기소리는 그대로인데 다시 몸 비벼대는 청노루 녀석과 들어섰던 청운사 낡은 집이 아니다.

  "머 해. 나와 봐/ 우리 여기 뒤쪽 밭 사서 퇴직 후 다 함께 살자."

   청노루 녀석 눈 속에 비친 하늘이 너무도 생생하여 먼저 일어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는 정 박사 목소리가 낯설기만 하다.

문학철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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