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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말세(末世), 혹은 말세(言稅)..
사회

말세(末世), 혹은 말세(言稅)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6/06/23 00:00 수정 2006.06.23 00:00
배정희 / 시인

수화기 저편의 아가씨는 상냥한 목소리로 나의 통화 패턴에 대해 알려준다.  나의 경우 휴일 전화 요금이 많이 나오니 만원을 더 내면 휴일에 10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나는 이러한 상업적 과잉친절에 두드러기가 있는 사람이라 처음엔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러나 몇 주 뒤 똑같은 전화를 다시 받았다. 아가씨는 나의 비경제적 사고를 바로 잡아 주어야 할 사명이라도 띤 것처럼 끈질기게 친절하다.

나는 결국 수화기 너머의 나긋나긋한 표준어에 설득 당하여 그리 하겠노라고 대답하고 난 뒤에야 통화가 끝이 났다.  하긴, 나의 휴대폰 요금도 만만찮으니 경제적이라면 그 방법도 괜찮으리라고 스스로를 위안해 본다.

이참에 휴대폰을 없애 버릴까 생각해 보아도 그건 가능한 결정이 아니다.

혹 차에 기름이 떨어진다면, 출근이 늦어진다면, 약속 장소를 잘못 알았다면, 이렇게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휴대폰 하나면 만사형통 아닌가?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 휴대폰. 소통을 위한 가장 편리한 도구. 물질문명이 인간의 심성에 미친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는 생각지 말자. 그 부정적 영향을 반대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 일이니까.

학교 아이들의 경우, 휴대폰은 자신을 표현하고 저장하는 수단이다. 책상 속에 넣어놓고 문자판을 보지 않더라도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달인의 경지에 이른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휴대폰을 선생님께 압수당하면 그 때부터 아이들은 안절부절 못한다. 그 순간 아이들은 분명히 상실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포로가 된 휴대폰을 되찾기 위해 변명과 거짓말, 아양과 애교, 동정심 유발, 순종적 자세 등 갖은 전략을 다 쓰는 아이들을 보면 귀엽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다. 
 
 소인의 말장난을 귀하는
 눈장난 삼아 읽어 주십시오
 
 말세는 전화 요금이다
 말세라고 말 많이 하는 목사님네 집
 말세는 얼마나 나올까
 말세 바가지를 한번 씌워 보면
 말세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고 믿겠지
 말세는 한 달에 한 번씩 다가온다 누가
 말세가 다가오는 걸 모르나 자기만 아는 척
 말세다라고 말장난하는 시대는
 말세다 전화요금이 많이 나오는 시대다
 함민복 <말세> 전문

 
이 시는 말세(末世)와 말(言)세(稅)의 동음을 이용한 언어유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시이다. 언어유희가 그렇듯이 시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

언뜻, 말세(言稅)가 많이 나오는 시대가 말세(末世)라는 듯이 읽힌다. 하지만 이리저리 뜯어보면, 우선 말세가 많이 나오니 전화를 많이 건다는 얘기이겠고, 전화를 많이 건다는 것은 시적 화자가 외로운 사람이라는 얘기이겠고, 말세가 많이 나오니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횟수가 줄어든 세상이라는 얘기도 되겠다.

그러나 나는 이 시의 사족처럼 보이는 앞부분의 2행에 주목한다. "소인의 말장난을 귀하는/ 눈장난 삼아 읽어주십시오"라는 부분에서 나는 말세(末世)를 읽는다. 말장난이, 무성한 말장난이, 말세(言稅)가 많이 나오는 시대, 말세(末世)의 징조는 아닐까?

배정희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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