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 1학기 모집에 지원하려는 아이들과 상담을 하면서 아주 진부한 듯한 질문을 던졌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은 건지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이건 아닌데…’ 하는 한숨마저 절로 난다. 어쩌면 자신의 평생을 좌우할지도 모르는 결정을 하는데 이렇듯 본질적인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니 화가 치밀어 오르다가 측은한 마음까지 든다.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다시 물었더니,
“선생님, 사실은 선생님처럼 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될 수만 있다면 해 보고 싶어요. 그런데 요즘에 교사되기가 엄청 어렵다면서요. 임용고사라는 걸 쳐서 합격해야 한다는데 그럴 자신은 없고, 그래서 저는 취직이 잘 된다는 간호사가 되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다시 간호사가 너에게 잘 맞을 것 같으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고 단지 취직이 잘 된다고 해서 간호학과에 진학하려고 한단다.
또, 다른 아이를 상담했는데, 대뜸 하는 말이 “선생님, 제 점수에 갈 수 있는 대학을 찾아주세요”라고 한다.
요즘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의 삶에서 추구해야 할 꿈과 이상을 위해 대학을 진학한다는 생각보다는 오로지 점수에 맞춰 대학에 진학하거나 취업 잘 되는 학과에 진학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입시 지도에서 나타나는 아이들의 이런 성향은 평소 수업 시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교사들에게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 지식만을 잘 전달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점수에 맞추는 삶이란 인간을 주체적이지 못하게 만든다고 아이들에게 항변하지만, 아이들은 지금 그걸 깨달을 수 없다. 그래서 점수에 맞춰 자신의 한계를 미리 정하고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고 자꾸만 삶의 영역을 한정한다.
수척해진 아이들의 얼굴에서 삶이 황폐해지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프다. 안쓰럽다. 그렇지만 꿈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 화가 난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고3의 삶은 너무나 고단하다. 옆에서 지켜보면 점수로만 평가받는 삶같이 보이기까지 한다. 수시 입학 원서를 쓰면서 한동안 한숨이 늘었었다. 누구는 예의바르고 성실해서 무엇이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합격만 시켜주면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놈의 점수가 뭔지 합격이 쉽지 않다.
또 누구는 이런 일을 하면 참 잘하겠는데 취업 잘 된다는 이유로 적성과 흥미에도 맞지 않는 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가까이에 있는 공부 잘 한다는 학교의 아이들과 비교 대상이 되어 열등감과 패배감을 가지면서 마치 벌써부터 하류인생에 속하기나 한 듯한 자포자기의 아이들이 보이기도 한다.
모두가 이름 난 대학에 들어가거나 취업 잘 되는 학과에 진학해야만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두가 그걸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발상을 바꾸어, 어떤 대학도 들어갈 수 있고, 누구든 어떤 일을 하든지 제 밥벌이를 할 수 있으니, 먹고 사는 일 외의 ‘삶을 가꾸는 꿈’도 꾸었으면 한다. 누군가 삶은 꿈꾸는 자의 것이라 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