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 매미소리 속에 본절 옆 느티나무 녹음(綠陰)은 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깊어졌다. 여름의 끝에 다다른 것이다.낮에는 아직 등과 가슴팍에 땀이 흘러내릴 만큼 무덥지만 내일이면 구월이라 생각해서 그런지 삼성반월교 밑을 흘러가는 통도천은 이미 여름이 아니다. 물빛이 한결 투명해졌고 무거워졌다. 본절을 감싸 안은 산언덕을 뒤덮은 깊은 녹음도 장(壯)할대로 장해서 생명을 길러내는 생령은 오히려 깊은 녹음에 가려 존재의 빛을 잃고 있다.가을의 붓질을 비켜 갈 단풍나무가 있을까. 이제 오래지 않아 가을은 깊은 어둠으로 죽어가는 초록들을 큰 붓으로 쓱쓱 닦아낸 다음 구석구석 남아 있는 티끌들 잔 붓으로 말끔히 닦아내고 마침내 마지막 단풍 하나마저 훌훌훌 털어낼 것이다. 잎으로 만난 것들 어느 하나 예외 없이 낙엽으로 다 헤어질 것이다.
삶과 죽음의 길은 / 여기에 있음에 머뭇거리고 / 나는 간다는 말도 / 못 다 이르고 갔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 한 가지에 나고 / 가는 곳 모르겠구나. 아아, 극락에서 만나볼 나 / 도 닦아 기다리겠노라-월명사의 '제망매가'전문
죽은 누이를 나(월명사)도 도를 닦아 미타찰(극락)에 가서 만날 것이라 한다. 월명사에게 있어 이승의 나는 하나의 나뭇잎 같은 존재이다. 그 존재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월명사는 '참나'를 통해 마침내 극락에서 누이를 또 만날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참나(眞我)'는 어디에 있는가. 나뭇잎이 나온 것은 나무의 가지 끝이다. 그렇다고 나뭇가지가 '참나'는 아닐 것이다. 그 궁극은 나뭇잎과 나뭇가지와 둥치, 뿌리까지 다 지닌 나무 자체일 것이다.그렇다면 나의 본질은 나뭇잎이 아니라 생명나무 그 자체이다. 잎은 어쩌면 생명나무로 하여금 하늘을 담는 것을 가리는 것일 수도 있다. 잎을 훌훌 다 벗어버린 겨울나무가 되어야 가지 속까지 하늘을 가져오는 본질 그 자체로 자신을 응시할 수 있게 된다.초록 벗겨나가는 머리 안타까워할 것도 아니요, 떨어지는 잎사귀 지우고 성글어가는 생명 안타까워할 것 아니다. 지는 잎 미련 없이 벗어버리는 가을나무에서 배울 일이다.
이 숲의 주인이 누군지 알 것 같네. / 그는 집이 마을에 있으니 나 여기 서서 숲이 눈으로 쌓이는 걸 / 지켜보고 있음을 모를 테지.내 조랑말은 이상하다 생각하겠네. /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 가까운 농가도 없는데 멈춰 선 것을, / 연중 가장 어두운 이 저녁에. (중략)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네. 그러나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으니,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여정. /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여정.-프로스트의 '눈 오는 저녁 숲 가에 멈춰 서서' 가운데
눈 오는 밤, 적막한 숲 가에 서서 시인은 어둡고, 깊고, 아름다운 숲으로 상징되는 '인생'을 느끼며, 잠으로 상징되는 '죽음'이 오기 전에 남은 인생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누구도 가을의 붓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초록은 닦여 나갈 것이요, 백발은 마침내 낙엽으로 흩날릴 것이다.
이제 가을 들어서려는 문턱일 뿐이다. 마침내 모든 것 다 떨어버려야 하는 겨울은 아직 몇 굽이 저쪽이다. 겨울을 견디고 새봄을 맞기 위해서라도 남은 삶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여정이 있다.
문학철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