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량문화축전 기간 중 일본으로 유출된 유물을 되찾기 위한 유물환수운동이 계획된 가운데 한 일본 문화재단이 자국의 뿌리를 찾기 위해 동면 법기리 도요지 발굴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눈길을 끌고 있다. '우리 사발 이야기'라는 책을 통해 일본인이 열광하는 다완(茶碗)의 뿌리가 우리나라에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신한균씨는 최근 일본 노무라문화재단 타니아키라(俗晃) 학예부장으로부터 법기리 도요지 발굴에 관한 제안을 받았다고 밝혔다. 신씨에 따르면 일본에서 국보급으로 취급되는 다완의 원천기술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이다. 법기리 도요지는 임진왜란 이후 수교가 끊기고 다시 복원되기까지 일본과의 교역을 위해 1607년 동래부사가 현재 부산 용두산 공원 인근에 위치했던 왜관에 설치된 가마와 별도로 김해, 양산 등에 설치한 가마터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이미 신씨는 책을 통해 일본 다완과 문양 및 방식이 동일한 사발이 법기리 도요지 일대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법기리 도요지가 활성화되었을 당시 이곳 가마에서는 일본 수출을 위한 이른바 '주문생산'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라문화재단에는 이 당시 직접 일본인들이 주문한 사발의 주문서를 비롯한 각종 자료가 1천여권 가량 남아 있어 이곳 가마에서 생산한 사발의 인기를 짐작케 한다. 법기리 도요지는 지난 1963년 사적 100호로 지정되었지만 이후 이렇다 할 관리없이 창기마을 뒷산 기슭에서부터 주거지와 묘지, 밭 등이 들어서 있는 상태다. 이미 왜관이 있던 부산요의 경우 도시 개발로 발굴이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된 상황이어서 법기리 도요지는 일본인들이 열광하는 다완의 원천기술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곳이다. 신씨는 "일본인이 좋아하는 사발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던 백자와는 다른 투박한 것"이라며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방치해온 유산을 일본인들은 자신의 뿌리와 마찬가지로 여기고 있다"며 이번 노무라문화재단의 제안을 양산 관광자원 개발의 기회로 보고 적극적인 시의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 시 관계자 역시 "법기리 도요지가 중요한 관광자원으로 개발될 수 있도록 관련 법규를 검토한 뒤 적극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잃어버린 북정고분군 유물을 되찾기 위한 환수운동이 가시화되는 시점에 일본인들의 뿌리 찾기는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는 평가다. -----------------------------------------------------------◆ 사적 100호 동면 법기리 도요지란? 법기리 도요지는 임진왜란 이후인 조선 중기 16~7세기경 지방에서 사용하던 백자를 만들던가마터로 한국과 일본의 도자기 교류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동면 법기리 창기마을 인근 산기슭에서 시작하는 옛 가마터는 지금은 주거지, 묘지, 논밭 등 경작지로 가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되어 있는 상태.시 홍보책자에 나와 있는 법기리 창기마을에도 도요지를 안내하는 표지판조차 찾을 수 없고, 주거지 샛길 끝에 경작지를 지나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사방이 경작지로 둘러싸인 법기리 도요지는 자그마한 터에 도요지를 설명한 표지판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을 뿐 그 어떤 다른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이 곳은 오래 전부터 근처에 있는 창기마을의 이름을 붙인 '창기사발'을 만들던 가마터로 알려진 곳이다. 지난 1963년 사적 100호로 지정된 이곳은 사적지로 지정된 곳 외에도 산기슭에서 산 정상 부근까지 소나무를 주로 사용하는 가마의 특성상 창기마을 뒷산 전역에 걸쳐 가마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조선에서 사용하던 백자와는 다른 모양과 방식의 사발이 생산되던 이 곳은 일본인들이 좋아하던 사발을 이른바 '주문생산'하던 가마터로 도자기의 형태는 대부분 만들어진 모양새가 거칠고 투박한 것이 특징이다. 가마가 활성화되었던 조선 중기 이후 일본 사회에 큰 인기를 누린 조선 사발의 우수성을 증명하고, 한국과 일본의 도자기 교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