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31일, 본사 편집부로 전화가 걸려왔다. 한 지역 일간지 1면에 그것도 박스까지 친 양산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양산시민들이 경남도민들에게 망신살 사게 생겼다.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눈 이 먼 나으리들,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잔뜩 흥분한 그는 댓바람부터 영문도 모르는 사람을 목청 높여 투박했다. 또 어떤 공인이 부도덕한 일이라도 저질렀나, 아니면 대형 비리 사고라도 터졌나,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 한편으론 언론사에서 흔히 말하는 ‘특종을 물 먹은 게 아닌가’ 싶어 다급히 그 일간지를 찾아 들었다. 기사 내용은 이렇다. 가을이라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고 있는데 정치인이나 기관장들이 의전을 놓고 신경전을 벌인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니 자리가 누구보다 앞줄이어야 하지 않느냐. 왜 내빈 소개 때 나를 누구 보다 뒤에 소개하느냐. 행사장에 늦게 도착한 인사를 소개 시키느라 행사가 중단된 일 등 높으신 분들의 유치하기 그지없는 형태와 높으신 분들을 배려하느라 정작 행사 틀거리를 무시한 주최 측의 몰상식한 행위를 나무라는 기사였다. 이 기사를 읽은 본사 취재부 기자들 역시 종종 봐온 볼썽사나운 모습들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면서 내 놓는 해결책이 이렇다. 학교 다닐 때 지각을 하면 여러분 수업 중에 철수가 늦게 도착했습니다.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이러진 않는다. 매를 맞거나 걸상을 들고 교실 뒷켠에서 벌을 선다. 그러니까 행사장에 늦게 도착하는 내빈은 벌을 세워야 한다. 나이 순 또는 가나다 순으로 소개하는 등 ‘행사 의전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면 문제 될 게 없다. 정치인, 기관장들은 입만 열면 시민들의 공복이라고 하니 앞으로는 관중과 내빈이 앉는 자리를 바꾸면 된다는 등... 다분히 희화화한 처방에 한바탕 웃고 말았지만 입맛이 썼다. 사실 정치인이 만사 제쳐놓고 행사에 참석하는 주된 이유를 정치인 본인도 알고 시민들도 안다. 행사를 준비한 이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시민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라고. 솔직히 말하자 ‘눈도장 찍기’와 ‘자기 과시’가 목적이 아닌가. 참석자가 많은 행사일수록 그들 역시 참석율이 높은 현상이 이를 반증하며 소개 순서나 자리다툼 따위를 벌이는 게 자기 과시가 아니고 무언가. 일견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들의 불가피한 행사 참석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참석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내빈 소개, 축사, 격려사, 환영사 따위로 이어지는 식순은 우리를 짜증나게 한다. 게다가 어찌 그리 복사한 듯이 유사한지 그게 그것인 식상한 인사말치레, 더구나 정작 본 행사는 시작도 안했는데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행사장을 떠나는 그들을 보라. ‘넘버 3’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따로 있지만 이 영화에서 한석규와 박상민은 서열을 두고 끊임없이 경쟁한다. 영화 속 조폭 사회의 구조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사회의 구조가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기관장이나 정치인들의 의전 논란도 따지고 보면 서열 다툼에 다름 아니다. 자기가 맡은 공익적 직무에 대한 헌신성이나 전문성 강화는 제쳐두고 서열이나 따지고 언론 플레이나 일삼으며 시민들에게 거짓 이미지나 심으려는 정치인들. 정작 행사의 주체는 젖혀두고 어떤 내빈이 얼마만큼 참석했느냐를 비교하며 단체의 위상을 가늠하거나 높은 분을 두고는 규칙도 없는 의전. 이는 우리를 무력으로 지배했던 군부독재의 잔재로 하여 아직도 유, 무형의 폭력이 시민을, 사회를 위협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할 것이다. 주객이 전도된 행사, 주객이 전도된 사회, 그 불온한 현상을 이제 곧 시민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높으신 분들이 알았으면 좋겠다.한관호/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