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은 ‘학생의 날’이다. ‘스승의 날’에는 학생들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인해 선생님들이 황당한 일을 겪는 일종의 곤욕의 날인데, ‘학생의 날’에는 아이들에게 의미 있는 추억을 만들어 주려고 고심한다. 이 날 선생님들은 여는 때보다 일찍 출근하여 등굣길의 아이들을 맞이하면서 사탕과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올해에는 특별히 ‘꼭 껴안아 주기’가 있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다. 안아주겠다는 아줌마 선생님들은 녀석들에게 거부당하고, 녀석들이 안아달라는 젊은 여선생님은 도망가기 바쁘다. 장성한 청년을 껴안는 일이 사제지간이라고 해서 스스럼없는 일은 아닌가보다. 하지만 말썽꾸러기 녀석을 숨 막히게 안아주는 남선생님들의 표정이 아름답다. 요즘 ‘자유롭게 껴안기(FR EE HUGS)’ 운동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어 벌써 열렬한 거리 운동가들도 등장한 모양이다. 이 운동은 2년 전 호주에서 후안 만이라는 청년이 시작했다는데, 가장 따뜻한 신체언어인 포옹을 통해 이 사회의 소외와 고립을 치유하려는 청년의 마음이 드러나는 발상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이 껴안기에 익숙하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유교적 성향을 집단무의식으로 가지고 있는 사회여서 더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유교(학)는 여러 가지로 규정할 수 있겠지만 나는 유교가 가진 ‘거리(距離)의 미학(美學)’을 존중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인간(人間)’으로 규정하는 동양적 사고는 개인과 전체에 대한 통찰을 잘 보여준다. 유교는 그 거리를 ‘예법(禮法)’을 통해 구현한다. 그러므로 예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갖추어야 할 기본이며,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이기도 하다. 껴안아줄 수 있는 만큼의 거리, 즉 거리 없는 사이일수록 그 간격은 분명하여 그 사이에 지켜야할 예법이 더욱 조심스럽게 존재하는 것이다.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 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았다
- 안도현, <간격> 전문몸은 그를 껴안되, 마음은 그 껴안음을 엄격히 하는 거리를 가질 수 있는 경지를 갖추는 것이 ‘거리의 미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간격이라고나 할까? 껴안음만 있고 간격은 없는 사회라면 무척이나 어지러울 듯하다. 마치 이벤트만 있고 정신은 없는 스승의 날이나 학생의 날처럼.울울창창한 숲에서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처럼, 상대를 껴안되 그 간격을 지켜주는 아름다운 사람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