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교직생활을 뒤로 한 채 선택한 그의 길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보람된 길이었다. 해방이후 고아가 많았던 시절 부친이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한 명, 두 명 집에 데려와 함께 생활하며 자랐고 부친이 애육원을 설립하면서 집보다 시설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 한 때가 많은 김원장에게 그들은 모두가 한 가족이었다.친 자식과 같은 원생 46명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김원장에게 큰 꿈과 포부는 없다.
단지 애육원의 아이들이 잘 클 수 있도록 열심히 뒷바라지하고 아이들이 사회에 진출해 열심히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랄 뿐이다.어느덧 설립 60주년을 맞은 애육원을 운영하며 보람되고 기쁜일도 많았을 그에게 가장 보람된 때가 언제였는지를 묻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간다고 말한다.그는“지난 칠순 때 우리 아들, 딸들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며 말문을 연다. 고등학교 졸업 후 원을 나갔던 원생 100여명이 직접 칠순 잔치를 마련해 애육원을 찾아 사랑을 베푼 것이다. 김원장은 “그렇게 뜻 깊고 감동 깊은 생일은 없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고 말한다.이렇게 수많은 아이들을 키워온 그는 현장교육에 중점을 두고 아이들 개개인의 특성과 개성을 존중하며 바르게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현재의 육아원은 과거 의식주 해결을 우선시하던 때와는 다르다. 먹고 싶은 것과 입고 싶은 것, 머리스타일 등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개성에 맞게 존중해야한다”며 “능동적으로 자신들의 욕구를 표현하고 충족시켜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예전에는 속을 썩이는 아이들을 많이 야단치고 했지만 이젠 문제아를 문제아로 보지 않는다”며 “말썽을 많이 부렸던 아이들이 나중에 다 잘 되어 찾아오더라.(웃음) 말썽을 피우는 아이들을 보면 ‘나중에 제법 잘 되겠다’싶다는 생각이 든다”며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전했다.
이렇게 보람을 느끼며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지만 재정은 어렵다. 겨울철이 되면 연료비가 부족해 아이들이 보다 따뜻하게 한 겨울을 나지 못해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75명이 생활할 수 있는 건물이지만 정부는 46명의 연료비만 지원해 주고 있어 겨울이 되면 연료비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마음이 추운 아이들이기에 어렵지만 보금자리만큼은 따뜻해야 한다며 웃는 김원장. 그의 훈훈한 마음만큼 많은 시민들의 사랑으로 애육원이 따뜻한 겨울나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