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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달무리(月暈)
사회

달무리(月暈)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6/12/01 00:00 수정 2006.12.01 00:00

소설(小雪) 지나고 눈 소식이 들린다. 

노무현 대통령이 28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임기 못 마친 첫 대통령이 안 됐으면 좋겠다고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권력행사 좌절 … ‘계산된 비명’]이라는 제목으로 일간지가 대응하고 있다. 대통령과 중앙일간지가 어느 정도 뒤틀려 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제목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하지만 절이 싫은 게 아니라 절을 운영하는 방식이나 구조가 잘못되어 싫다면 그 운영방식이나 구조를 올바르게 뜯어 고쳐야 한다. 대통령이 저항에 못 견뎌 도망쳐서는 안 될 일이다. 물러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세상만 시끄러운 게 아니다. 학교에서, 집에서 아이들과 대화가 잘 풀리지 않는다. 무언가 잘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때면 떠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지만 세상과 내 자신의 시끄럽고 힘든 현실로부터 떠나 한동안 숨어 살고 싶다는 생각에 젖어들 때가 있다.

첩첩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 집, 외딴 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 기인 밤입니다. 외딴 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무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溫氣)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 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박용래의 「월훈(月暈)」전문

첩첩산중보다 더 깊이 들어앉아 가려진 굴 속 같은 강마을. 함정 속처럼 감추어진 마을. 그 마을에서도 외딴 집. 창호지가 모과 색으로 바랜, 콩깍지처럼 나지막하고 작은 집. 긴 밤 이슥토록 모과 빛으로 밝혀진 작은 창.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무를 깎기도 한다. 바람도 없이 시나브로 풀려 내리는 지푸라기의 설레임을 듣는다. 후루룩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밤새들의 온기를 생각한다. 조용한 세계다. 벽이 무너져라 우는 귀뚜라미 소리가 오히려 더욱 고요하고 적막한 느낌을 자아내게 만든다.

펄펄 함박눈이 흩날려 창호지 문살에 눈이 쌓여 월훈(달무리)같은 무늬를 만든다. 창호지 한 장으로 안과 밖을 나눈 방 안 역시 눈을 녹이지 않을 만큼 차기만 하다.

깊은 산골보다 더 깊이 굴속처럼 감추어진 강마을 외딴 집의 고요함과 그 고요한 겨울밤을 밝히는 노인이 쓸쓸히 살아 숨 쉬는 시이다.

이렇게 첩첩산중보다 깊이 감추어진 강마을이 있을까. 이렇게 세상의 말 그대로의 소음으로부터 뚝 떨어져 태초의 고요함을 그대로 지닌 곳이 있을까.

쓸쓸하고 쓸쓸하며 적막하기까지 하지만 이러한 쓸쓸함 속에 나를 던져두고 싶다. 누렇게 바랜 창호지 문창에 눈발이 날려와 월훈(달무리月暈)을 만드는 고요한 강마을에 묻혀 욕심과 욕심 때문에 생겨난 시름을 곰삭여 내었으면 좋겠다. 이런 강마을에서.

곧 다가올 대설(大雪)에는 쌓이지는 않더라도 함박눈 펑펑 쏟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 속 시끄러움이나 세상 시끄러움이 잠시라도 멎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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