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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노숙에 부쳐
사회

노숙에 부쳐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6/12/08 00:00 수정 2006.12.08 00:00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김사인, 「노숙」전문

추위가 지독하다. 등 따습고 배 부른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따뜻한 누울 자리와 끼니 걱정 없는 상태에 충분히 행복했던 시절 말이다. 허나 요즘 사람들은 언제나 배고프다. 헝그리(hungry) 정신이라는 말도 있다. 물론 이 말이야 허기를 견디는 악착같은 정신(의지)를 뜻하지만  인간이 가진 성취동기를 허기로 표현하는 것은 이 시대의 탐식성(貪食性)을 잘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하다. 먹어치우기, 웰빙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먹어치우기를 꿈꾸는 것이 고작 인간 이성의 발전 방향이라면 참 춥다. 

정신의 허기를 채우는 것은 근원적으로 육체적 허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경제적으로 윤택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인류사적 업적들, 흔히 예술이나 학문에서 이루어진 위대한 업적들을 생각해 보라. 절망이 기교를 낳는다고 했던가? 육체적 허기는 정신을 치열하고 윤택하게 한 힘이 되었으니 인생이란 곧 이 역설의 이치를 깨닫는 데서 성큼 성숙해지기도 한다.

<노숙>이라는 제목의 시를 보니 노숙자가 떠오르고, 아마 시인도 어떤 노숙자의 잠든 모습에서 시의 발상을 넓혀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이 시는 노숙자에 대한 시가 아니라 정신(마음)과 육체간의 대화를 통해 삶의 길이 노숙(露宿)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시다.

물론 화자는 마음이다. 아니 영혼이다. 그러니까 영혼이 몸을 돌아보는 시이다. 어찌 사람을 마음과 몸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겠는가? 시는 인간의 온전함을 구현하는 정신과 육체, 그것이 바야흐로 분리되는 시점을 보여주고 있다. 몸을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 혹은 몸을 떠날까 하는 마음의 마지막 물음은 몸의 고달픔을 통해 이 세상에서의 삶이 노숙과 같이 고단한 것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몸을 부려 노동하고, 몸을 부려 가정을 이루고, 이제는 지쳐버린 몸. 또다시 낯설고 어두운 구석에 떨어져 고달픔을 견뎌야 하는 것은 순전히 몸의 몫이다.

몸이 마음을 놓아버리는 날은 끝장의 날이겠지만 지상에서 몸이 겪은 고달픔이 안쓰러워 마음은 몸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라고. 몸과 마음이 비밀리에 협상하는 이 마지막 지점이 지상과의 결별인가보다. 지독하게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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