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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신령한 양산의 큰 나무, 신전리 이팝나무..
사회

신령한 양산의 큰 나무, 신전리 이팝나무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7/01/02 00:00 수정 2007.01.02 00:00

마을마다 사연을 가진 나무들이 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이 땅을 지켜온 큰 나무들. 지난해 지역신문발전기금 저술사업을 통해 양산 곳곳에 우리 삶을 지켜온 큰 나무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책으로 엮어보았습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온 큰 나무들의 새 의미를 2007년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할 양산시민들과 함께 다시금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지면을 통해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1.상북면 신전리 신전마을 이팝나무

“봄에 흰 눈꽃이 내리면
한 해 농사가 대풍 일세”

해마다 5월이면 가지가지마다 흰 꽃을 피우는 이팝나무는 꽃의 모양새와 색깔이 흰 쌀밥 같다고 하여 이팝(이밥)나무라 불린다는 설이 있다.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옛 시절 이밥(쌀밥)은 말 그대로 이(李)밥, 조선시대 임금이 벼슬을 내려야만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처럼 풍족한 삶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팝나무는 5월 중순 파란 잎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꽃을 피우는데 그 모양이 마치 쌀밥그릇을 엎어놓은 것 같다.

이팝나무는 현재 양산시의 시목(市木)으로 지정되어 양산을 상징하는 신령한 나무이다.
상북면 신전리 95번지 신전마을에 있는 350년된 이팝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신전마을의 당산목에서 양산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큰 나무가 된 셈이다.

논밭 가운데 당산등에 있던 신전마을 이팝나무는 지난 1971년 천연기념물 제234호로 지정되면서 보호를 받고 있다.

신전마을 이팝나무는 국도 35호선을 타고 가다 보면 양산천 너머 들판에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논밭 한가운데 당산등에 있어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팝나무는 멀리서 보면 마치 두 그루의 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 듯하다. 하지만 밑동부터 갈라져 한 그루의 나무가 두 그루로 보일 뿐이다.

수령 350년 이상으로 추정되며, 신전마을에 수원 김씨들이 정착하면서 당산목으로 정하고 매년 당산제를 지내왔다.

“세월이 좋다”

임진왜란 당시 밀양에 살던 수원 김씨 일가들이 처음 뿌리 내린 곳은 하북 용연리 용소골이었다. 그러다 일부가 지금의 신전마을로 터를 잡은 것이다.

신전(新田), ‘새밭’이라는 말처럼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 이팝나무를 당산목으로 정한 배경이 되는 셈이다.

전란의 곤궁함을 벗고 더욱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 바로 500여년 전 새 삶터를 찾는 이들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신전마을의 옛 이름은 ‘도륜대(道輪臺)’였다. 전란으로 인한 피난 생활을 접고, 자연과 더불어 후손들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도륜대 사람들은 양산천을 따라 억새밭을 갈고 농지로 바꾼 억척스러움으로 오늘의 신전마을을 일구었다. 

그들의 노고를 지켜보고 위로해준 것이 바로 신전리 이팝나무의 그늘과 신령함이었던 것이다.
신전마을 주민들은 ‘세월이 좋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정월 보름달을 보면서 달이 크게 차면 내년 농사가 대풍일 것이라고 믿거나, 달이 천성산 자락에 떠오르는 위치를 보고 내년 운세를 점치곤 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팝나무는 5월 중순이면 새하얀 꽃을 피워낸다. 마을 저편까지 피어오르는 이팝나무 꽃향기는 먹지 않아도 배부를 법한 흰 쌀밥의 고소한 내음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신전마을 주민들은 봄에 이팝나무 꽃이 어느 정도 피는가를 보고 ‘세월이 좋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그 해 농사는 대풍을 이루고, 꽃이 좀 부실하다 싶으면 ‘세월이 좋지 않다’며 한 해 농사 걱정을 하곤 했다는 것이다.

이팝나무의 또 다른 유래는 바로 입하(入夏)목이다. 5월 중순 여름이 들어가기 전 입하 무렵에 꽃을 피운다고 해서 생긴 유래다. 논에 모를 심고 본격적인 농사철로 접어드는 즈음에 꽃을 피우는 상스러운 나무라는 말이다. 더구나 그 시기는 보릿고개를 겨우 넘기고 주린 배를 이끌고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무렵이라는 점에서 당시 곤궁한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어느 것이 이팝나무의 정확한 유래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농사를 주로 짓던 시절 이팝나무의 흰 꽃을 보며 길흉(吉凶)을 점쳤던 것은 순박하지만 여유 있었던 우리네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양산천과 이팝나무

신전마을 앞으로 흐르는 양산천은 양산의 또 다른 상징이다.
하북에서 동면에 이르는 양산천은 양산 사람들의 젖줄처럼 도도히 흘러왔다.
양산천이 바로 내려 보이는 당산등에 올라 타있는 이팝나무는 양산천과 함께 양산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함께 짊어지고 늙어가고 있다.

이팝나무를 중심으로 펼쳐진 들에서 농사일을 하고, 소를 몰던 아이들은 신령한 이팝나무 옆에 있는 팽나무 숲에서 땀을 식히곤 했다. 그 숲에는 ‘배락방구’라 불리는 넓적한 바위가 있는데 아이들과 어른들의 좋은 휴식처를 제공했다.

넓적한 바위는 위가 평평해 서너 사람이 충분히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런데 한가운데가 마치 사과를 두 쪽으로 쪼개 놓은 듯 금이 가 있어 주민들은 벼락을 맞아 그렇게 된 모양이라고 ‘배락방구’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초라하게 늙어가는 이팝나무처럼 덩굴에 뒤덮여 일부러 찾지 않는 한 잊혀가는 추억의 장소일 뿐이다.

주민들이 삶을 이어가는 곳이 비단 들판과 골짜기뿐이었으랴.
불과 얼마 전까지도 신전마을 앞 양산천은 이팝나무 꽃마냥 하얀 모래밭으로 햇볕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모래를 마구 채취하는 바람에 지금은 황량한 자갈 마당으로 변해 있다. 

이팝나무가 내려다보는 양산천은 아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놀이터였을 뿐 아니라 은어가 올라올 정도의 맑은 물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고기를 잡는 기쁨을 누리게 하는 또 다른 삶의 터전이었다.

새로 태어나는 이팝나무

지난 1981년 양산시는 이팝나무를 시목(市木)으로 정하고 양산을 상징하는 나무로 삼았다. 시내 곳곳에 이팝나무를 심어 이팝나무 거리를 조성하면서 오랜 세월 신전마을 주민들과 호흡해 온 이팝나무는 양산시민의 나무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신전리 이팝나무는 논밭 한 가운데 덩그렇게 방치되어 왔다. 양산시는 2005년 연말부터 신전리 이팝나무를 시민친화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정비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들어갔다.
주변 농지를 사들여 시민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진입도로와 주차시설, 산책로 등을 정비해 명실상부한 시의 상징목으로 자리 잡게 될 예정이다. 내년 5월이면 양산시민들이 흰 눈꽃이 만발한 이팝나무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신전마을 주민들이 새 삶을 찾아 이주해 온 신전마을의 안녕을 빌던 이팝나무가 경남에서 가장 눈부신 발전을 보여주는 양산의 신령목이 된 것이다.

개발도시인 양산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오는 유입인구들이 해가 바뀔수록 늘어나면서 역동적으로 변모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도시의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공동체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는 상황이다. 처음 신전마을을 일군 주민들이 이팝나무를 중심으로 삶의 의지를 다졌듯이 새로운 양산의 미래도 이팝나무 그늘 아래 하나가 되었던 옛 이야기처럼 환하게 피어오르길 기대한다.

신전마을의 옛 이름인 ‘도륜대’에 대해 주민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 준다.
신전마을 이팝나무가 있는 곳이 상북 외석, 대석리, 하북 용연리 주민들이 오가는 통로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도륜대가 바로 ‘사람들이 돌아가는 곳’이라는 설명이다.

사람과 사람을 잇고, 지역과 지역을 잇는 그곳에 바로 이팝나무가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셈이다. 양산의 넓은 지역을 서로 잇고, 양산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주는 곳, 신저만을과 이팝나무가 있다.

이제 신령한 이팝나무가 현대적인 의미로 거듭나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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