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이 땅을 지켜온 큰 나무들. 지난해 지역신문발전기금 저술사업을 통해 양산 곳곳에 우리 삶을 지켜온 큰 나무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책으로 엮어보았습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온 큰 나무들의 새 의미를 2007년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할 양산시민들과 함께 다시금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지면을 통해 나누려고 합니다. 웅상읍 소주리 백동마을 느티나무넉넉함이 한아름, 더욱 고마운 나무
백동마을 1253번지에 떡 하니 자리하고 있는 수령 400년의 느티나무는 높이 17m에 둘레가 4.4m되는 당산목이다. 고목이라고 하기에는 하도 푸르고 싱싱해 마을사람들의 보살핌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다.온 마을 사람들이 다 둘러 앉아도 될 만큼의 넓은 터가 마음까지 넉넉하게 한다. 아파트와 건물 사이에 끼어 점차 고사해 가는 다른 노거수와 달리 이곳 느티나무는 그 자태부터가 다르다.
이 마을의 수호목이 된 지 400년 동안 숱한 풍상을 겪었을 법도 한데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이 당산나무 같지가 않다. 주변에 유치원 마당과 붙어 있는데 이곳 아이들은 특별한 놀이시설이 없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른 들은 다 어디 가고
양산에서 가장 보존환경이 좋은 소주리 백동마을 느티나무를 찾아가는 길이다.
차창 밖으로 대평들과 모랫들이 눈 안에 한껏 들어온다. 추수가 끝난 논에는 볏짚단이 쌓여 있고 밭에는 김장 배추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최근에 이름을 바꾼 천성리버타운(장백아파트)을 지나 백동마을 초입에 들어서니 하교하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재잘거리며 내려오고 있다. 구불구불한 좁은 길을 조심해서 운전해 가는 데 백동마을 느티나무가 금새 눈앞이다. 내려서 느티나무 끝자락을 보려니 고개가 아프다.
전설의 고향 백동마을
백동(栢洞)은 원래 백홈마을이라 했다. 500여 년 전 이 마을에 백씨(白氏)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랫들(지금의 사평마을)에 농사를 지으려고 잣나무로 만든 홈 백 개를 이어 농업용수로 사용하였기에 백홈이라고 지명을 붙였다가 일본 강점기때 한자화 하여 백명(栢椧) 또는 백동(栢洞)이라 하였다고 한다.백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는지 백동마을 박도진(65) 이장에게 물으니 한 명도 없단다.
3대째 백동마을에 살고 있다는 박도진 이장은 “어릴 때 백씨들의 논이 있어 소작료 받으러는 왔었는데 마을에 살지는 않았다”고 한다. “마을 위쪽으로 백씨들 조상묘도 있는데 요즘은 성묘도 안 오는 것 같아”라며 자신도 못내 궁금하단다.이 마을에는 같은 곳에 나란히 서 있는 비석이 두 개 있다.
백공제단비(白公祭壇碑)와 박씨당(朴氏堂) 할머니 불망비(不忘碑)가 바로 그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는 비석일까? 사연은 이렇다.500여 년 전에 백홈에 살던 백씨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의 논(1500여 평)을 마을에 기부하고 죽게 되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음력 9월 9일 백씨의 묘를 벌초하고 제사를 지내고 있었는데 일본 강점기 때 기부한 논의 일부가 군유지로 몰수되고 지금은 500여 평만 남아 있다. 원래 백씨의 묘는 모랫들(지금의 새진흥아파트 자리)에 있었다.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묘는 없애고 제단 비만 세우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의 백공제단비(白公祭壇碑)다. 박씨당 할머니 불망비는 더 재미있는 전설을 안고 있다.박씨당 할머니는 백동마을에 살았던 분으로 후손이 할머니의 제사가 필요 없다 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았더니, 그해에 주민들이 병에 걸리고 농사가 흉년이 들어 다시 제사를 지낸 뒤로는 병이 없어지고 농사가 대풍이 들었다는 전설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백공(白公)과 박씨당(朴氏堂) 할머니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넉넉함이 한아름, 더욱 고마운 나무
이 마을의 수호목이 된 지 400년 동안 숱한 풍상을 겪었을 법도 한데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이 당산나무 같지가 않다. 주변에 유치원 마당과 붙어 있는데 이곳 아이들은 특별한 놀이시설이 없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에 더우면 교실에 있지 말고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선생님께서 해주시는 옛날이야기를 들어도 좋고, 크레파스로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도 좋을 일이다. 이날도 백동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10여명이 느티나무 아래서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학교를 파하자 마자 부리나케 학원으로 내 다르지 않아서 좋고, 땅을 밟고 손에 흙을 묻힐 수 있으니 좋다. 먼 훗날 제 친구들이 가지지 못한 멋진 추억 한 토막을 이 아이들은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더운 여름날 나무 아래 누워 낮잠을 즐기는 것도, 한여름 밤에 이 넉넉한 터에 돗자리 깔고 밤하늘을 쳐다보는 것도,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백동마을의 느티나무는 신목(神木)과 기상목(氣像木)으로, 당산나무와 정자나무로 마을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당산제도 세월 따라가야지
97년 개축해서 그런지 백동마을의 당집은 현대식 대문에 건물도 깨끗하다.백동마을의 당산제는 97년을 기점으로 전과 달리 지낸다고 한다.박도진 이장은 3대를 이곳에서 살아 와서 그런지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당제 변천사에 환하다. 백동마을 당산제에 대한 박이장의 설명은 이렇다. 양산지역 대부분의 당산제가 그렇듯이 백동마을 당산제도 정월 대보름에 지내고 있다.
마을 원로들이 모여 부정이 없고 덕망이 높은 사람을 제주로 뽑아 그 제주를 중심으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 제주로 선정된 사람은 3개월간 부정한 것에 대한 금기에 들어가고 정월 보름 자시(子時)에 혼자 제당에 들어가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보름날 아침 8시에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내는데 이유인즉 젊은 사람들에게 제사의 예법을 가르치고 그들의 동참을 유도하기 위해서란다. 제주도 하려는 사람이 없어 97년 이후부터는 경로당 회장님께서 당연직으로 제주가 돼서 초헌을 하고 나머지 노인 분들이 아헌과 종헌을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의 대동단결과 농사짓는 농부로서 풍년을 기원하고 자식들의 무사기원을 담아온 당산제가 현대사회의 산업화 앞에 바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수많은 사연을 보듬다
백동마을은 천성산의 아랫마을이다. 뒤쪽 산으로 잠시 오르면 백동저수지가 나온다. 그 저수지를 지나면 곧바로 계곡이 나오는 데 그곳이 피소골이다. 피소골은 물이 맑고 수목이 우거져있으며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 소(沼)와 폭포가 자리하는데 용이 승천하면서 피를 흘린 자국이 바위에 흰 줄로 남겼다고 해서 혈수곡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폭포는 혈수폭포라고 부른다. 피소골을 따라 오르다 보면 법수원이 나오고 잠시면 미타암까지 오를 수 있다.
소주리 일대에는 골짜기도 많고 바위도 많다.
뿔당골, 물골, 성지골, 금숫골, 여싯골, 버드나무골... 비둘기바위, 벼락바위, 절통바위, 평풍바위, 주걱바위, 삼형제바위...골짜기 마다, 바위마다 숱한 전설과 사연을 안고 그곳에 자리하고 있다.
천성산이 병풍처럼 서 있는 백동마을, 너른 들이 있어 풍요로웠고,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넉넉한 품으로 안아주는 느티나무가 있어 더욱 행복한 이곳 사람들이 부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