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즈음하여 밤만 되면 휴대전화로 음란성 스팸 문자메시지가 뻔질나게 날아왔다. 흥청대는 세밑이 성매매 관련 업종한테는 한창 대목 만난 철임을 짐작하게 했다.송년 모임 때 술자리를 가진 후 남자들이 어디에 잘 가는지는 답이 나온 셈인데, 여성부의 ‘성매매 방지 이벤트’도 이런 현실에 착안한 것이다. 그런데 왜 여성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있을까. 모든 남자들을 ‘잠재적 성구매자’로 몰았기 때문이란다. 조선일보는 ‘남권 침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가며 흥분했다. 내가 보기에 여성부의 잘못은 하늘 알고 땅 알고 내남이 다 알고 있지만, 세상이 모른 척하고 있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은 순진함에 있다. 진실을 기만하지 말자. 성 구매로부터 자유로운 한국 남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이벤트란 참여자가 유쾌하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딱딱한 정책을 추진하는 것과의 차이점이다. 여성부도 이것을 노렸겠지만 간과한 것이 있다. 성 구매에서 자유롭지 못하거나, 성매매 문제의 심각성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이벤트는 결코 즐거울 수가 없다. 부끄러운 데를 들켰으니 분노와 조롱부터 던지는 건 그들 수준으로서는 당연하다. 어차피 캠페인에 참여할 만한 사람들이라면 포상금이 없더라도 회식 자리 후 이상한 데를 기웃거리지 않을 것이다. 여성부가 순진했다면 이런 점들을 가볍게 봤다는 것 정도이다. 여성 지배가 거리낌없이 허용되는 술자리에서 ‘폭군’이나 ‘개’로 전락하는 남자들을 낳는 성차별 구조를 공격하기보다, 음주·회식 문화에 성 구매의 근본 원인을 묻는 것으로 비치는 한계도 있다. 그럼에도 술과 성매매의 밀접한 관계를 지적한 여성부의 캠페인은 두 가지 교훈을 세상에 던졌다. 우선, 성 구매는 남자들이 작심을 하고 계획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 술기운을 빌어 자연스럽게 별다른 죄의식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 구매가 이루어지는 환경으로서 개인이 아닌 ‘집단’의 성격을 일깨워준 데 있다. 개인보다 집단의 의지가 강조되는 자리에서 성 구매가 이루어지는 한 남자들의 죄책감이나 죄의식은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여성부의 캠페인은 성매매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화되어 있는 현실을 일깨워준 것이다.성매매 환경은 주택가까지 침범한 성매매 업소 수치에만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이 나라에서 성매매 문화와 무관한 곳이 과연 있을까. 여성들은 직장에서도 ‘꽃’이 되어야 하고 커피 심부름을 포함하여 업무나 복장, 외모 등에서 남자에게 성적 위안이 될 만한 여성성을 요구받는다. 군대에서조차 여군에게 화장과 치마 차림이 강요된다. 여성부의 정책이 근시안적이라고, 현실을 모른다고 욕하기는 쉽다. 그렇다면 욕하는 그 입으로 그럴싸하고 획기적인 대안을 내세워 여성부를 가르쳐주기 바란다. 그러나 여성 차별과 성매매가 공기처럼 일상을 뒤덮고 있어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사회와 정부에서 어떤 정책이나 이벤트 행사를 추진하더라도 당장 뾰족하고 적실한 묘안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 세상이 모르지 않는다. 어떤 일을 벌이든 욕을 먹게 되어 있으니 정부는 대안 없이 헐뜯는 소음에 연연해 할 필요는 없다. ‘성매매 방지 이벤트’는 성구매자의 93% 가량이 음주와 관련 있다는 여성부의 자체 조사 결과에 바탕을 두고 나왔다. 여성부에 돌을 던지고 싶은 자, 술과 성매매가 아무 상관이 없음을 스스로 입증해야 할 것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은 해외에 성매매 관광이 버젓이 홍보된 성매매 유입국이었다. 경제가 발전한 지금은 국내 시장이 ‘시시한지’ 남자들이 밖으로 떼로 나가 나라 망신을 시키고 돌아온다. 기껏해야 월드컵이나 북한 핵 문제 외에는 한국 관련 기사가 실리지 않는 해외 언론에 여성부 캠페인 기사가 소개된 것이 부끄럽다고? 과연 어떤 것이 더 참담하고 부끄러운 나라 망신이 될까.정문순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