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 사겠다는 친구는 심사숙고해서 장소를 골랐다. 세 사람이 모두 가고 싶은 곳은 초저녁에 이미 손님이 다 차버려서 자리가 없었다. 늘 친절한 얼굴의 안주인은 예약을 하고 와야 한다며 아쉬운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갑자기 차가운 겨울저녁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몇 군데 의견이 분분하다가 갈 곳을 정했다.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러자 하니 따르기로 했다. 따뜻한 실내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여기저기 환한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 메뉴판을 들고 온 아가씨가 물 잔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 손길을 유심히 보았다. 지난번과 마찬가지였다. ‘탁탁’ 하며 잔이 상에 부딪치는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났다. 아가씨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을 내리깔고 극도의 무신경으로, 아니 신경질로 상위에 내려놓는 그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쳐다보는 눈길을 느꼈는지 마지막 잔은 소리가 순했다. 아무 말도 못했다. 화가 치밀었지만… 점잖게 참기로 했다. 그 자리를 떠날 때까지 나는 아가씨가 음식을 가져올 때마다 신경이 쓰이고 거슬렸다. 남들이 안 입는 그런 옷을 입었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왜 으스대는가.
왜 까부는가. 왜 어깨에 목에 힘이 들어가 있는가. 왜 꼭 그렇게 미련을 떨어야 하는가. 하얀 가운을 걸치고 까만 망토를 걸치고 만원 버스를 타봐라. 만원 전철을 타봐라. 얼마나 쳐다보겠냐. 얼마나 창피하겠냐. 수녀복을 입고, 죄수복을 입고, 별 넷 달린 군복을 입고……
왼쪽 손가락을 깊이 베어 며칠 병원을 다녔는데 어떤 파리 대가리같이 생긴 늙은, 늙지도 않은 의사새끼가 어중간한 반말이다. 아니 반말이다. 그래서 나도 반말을 했다.
“좀 어때?”
“응 괜찮어”
그랬더니 존댓말을 한다. 그래서 나도 존댓말을 해줬다.
“내일 또 오십시오.”
“그러지요.”
―김영승, 「권태72」 나는 그날 위의 화자처럼 근사하게 대꾸하지 못했다. 기분만 내내 언짢다가 돌아오는 길에 너무 예민하고 까다롭지 않은가 하는 것과 끝내 아무 말도 못하고 나온 것을 반성했을 뿐이다.
서비스가 무어냐? 봉사가 무어냐? 그건 남을 위한 일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봉사다. 남들이 안 입는 옷을 입었으면 말이다. 몇 푼 안 되는 시급을 받는 아르바이트 자리여서 소홀히 하는가? 내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이라서 그런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 아가씨의 물 잔 놓는 손길에 따라 우리는 기분이 달라지는 작은 시민들이다. 그 손길에 좀 더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하는 아주 사소한 사람일 뿐이다. 세상이 좀 더 권태롭기도 하고 좀 덜 권태롭기도 한 그냥 사람일 뿐이다. 아가씨여, 손길을 부드럽게 하시라. 당신 손길이 세상을 얼마나 따뜻하게 할 것인가?배정화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