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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모진 세월을 이겨낸 우직한 나무, 북안마을 느티나무..
사회

모진 세월을 이겨낸 우직한 나무, 북안마을 느티나무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7/01/23 00:00 수정 2007.01.23 00:00

양산노거수 이야기-  더불어 사는 큰나무

마을마다 사연을 가진 나무들이 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이 땅을 지켜온 큰 나무들. 지난해 지역신문발전기금 저술사업을 통해 양산 곳곳에 우리 삶을 지켜온 큰 나무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책으로 엮어보았습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온 큰 나무들의 새 의미를 2007년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할 양산시민들과 함께 다시금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지면을 통해 나누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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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동 북안마을 느티나무

북안마을 느티나무는 가지가 동서남북으로 뭉게구름 마냥 넓게 퍼져 주변 주택가에까지 손길을 뻗치며 지난 800여년의 세월동안 북부동 최고의 어르신으로 마을을 보살피고있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갖은 풍파를 이겨내고 전설을 가진 당산나무이자 점잖은 우리네 할아버지로 살아온 북안마을 느티나무. 이제는 삭막한 세상에 우리네 이야기가 잊혀 가는 것이 아니라 나무 아래 모두 모여 옛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이 노인이 되어 마을 후손들에게 이야기보따리를 풀 수 있는 또 다른 구심점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북부동 양산문화원 뒤편 북안마을 주택가 입구에 가면 8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꿋꿋이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느티나무를 만날 수 있다.

비록 모진 세월의 생채기가 할퀴고 간 흔적이 뚜렷하지만 사람들에게 여전히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며, 마을을 보호하고 있는 지정번호 12-26의 느티나무이다.

북안마을의 느티나무는 도지정 보호수로 780살, 10m의 큰 키와 나무둘레 7.3m로 가지가 동서남북으로 뭉게구름 마냥 넓게 퍼져 주변 주택가에 까지 손길을 뻗치며, 북부동의 최고 어르신으로 마을을 보살피고 있다.

전설을 지닌 당산나무

당산나무는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터를 잡아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의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수십 년 전 번개까지 맞아서 큰 상처를 입었지만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 우직하고 강인함을 지닌 절개에 마음이 절로 숙연해진다.

또한 이렇게 모진 세월을 견뎌 온 것을 보면 나무도 대견하지만 뿌리를 내린 자리가 명당자리임이 분명하다.

필시 그럴 것이 800년의 뿌리를 내린 북부동 327번지는 옛날 양산읍성의 터로 동헌과 향교가 자리했던 사실과 현재 춘추원에 모셔진 삼조의열단의 비석도 애초 이곳에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명이 충분하다.

배산임수와 역사가 깊은 명당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느티나무에 치성을 드리면 사내 아기를 얻는다는 전설이 있어 마을 아낙네들의 소원목이 되기도 했다. 

또한 옛 선비들은 과거 시험을 보러 갈 때 꼭 이곳 당산나무와 여기서 불과 5분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수백 년의 세월을 함께 해온 당산할머니 나무에 들려 장원급제를 빈 후 떠났다고 전해온다.

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의 영험을 받아야 과거에 합격한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왔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입시생을 앞둔 어머니들은 이 나무를 찾아와 물을 떠놓고 합격을 기원하는 치성을 드린다.

또한 마을 사람들은 당산나무를 보고 그 해의 농사일을 점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산나무가 봄에 일제히 싹을 틔우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못하면 흉년이 되는 것이 해마다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마을의 신목인 당산나무에 마을 사람들은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 두 번 당산제를 지냈다. 

당산제를 지내는 날이면 온 마을은 축제 분위기였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한두 명씩 고향을 떠나고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한 해에 2번 지내던 당산제는 3월 3일 한번으로 줄어 마을 북안노인회 열댓 분이 정성껏 음식을 마련해 조촐하게 제를 올리고 있다. 

점잖은 우리네 할아버지

마을 노인들은 당산나무를 ‘점잖은 할아버지’라고 말한다. 이유인 즉 고사할 수 있는 많은 고비를 넘겼지만 내색 한 번 없기 때문이란다.

당산나무에게 온 첫 번째 위기는 임진왜란 때 들이닥친 큰 화마였다. 다행스럽게도 세월을 거듭하며 홀로 기력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1959년 한반도 남부를 강타했던 사라호 태풍 때 번개를 맞아 뿌리째 갈라지는 아픔을 겪어야했고 그러던 중 수술대에 올라 다시 회복기를 가졌다.

여기까지만 해도 우여곡절이 많았던 나무인데 이게 끝이 아니란다. 짓궂은 아이들이 파놓은 구멍에 무속인들은 치성을 드리기 위해 촛불을 켜 놓았는데 불이 붙는 바람에 몇 년 전 또 다시 수술대에 올랐던 것이다. 

당산나무가 점잖은 할아버지라는 건 그렇게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지만 마을 주민들에게 해코지 한번 하지 않고 마을의 안녕을 바라고 있기에 점잖은 어르신 중에 어르신이라는 것이다. 비바람에 할퀴고 가지를 잘리었어도 참고 견디며 자기의 소임을 다 한지가 800여년이니 어느 누구의 심성이 당산나무만큼 우직하고 인내심이 강하랴 싶다.

또 한 번 마을의 중심으로

당산나무는 수백 년을 주민들의 추앙을 받으며 위엄있고 점잖게 지내왔으나 지금은 다소 병색이 완연한 사람마냥 힘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당산나무를 둘러싼 주위 환경을 보면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고 나무를 쳐다볼 낯이 없어진다.

주택가 사이 태평하게 앉아 있는 듯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고 멀리서 보고 발걸음을 옮기며 또 한 번 쳐다보면 자리가 불편한 모습이 역력하다. 다행히 수천만 원의 예산을 확보해 울타리를 없애는 환경개선 사업이 이뤄진다고 하니 이보다 반가운 소식은 없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환경정비와 함께 당산나무 바로 옆 주택을 시가 매입해서 조그만 정자를 만들고 소공원을 조성해 다시 한 번 마을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삭막한 세상에 우리네 이야기가 잊혀 가는 것이 아니라 나무 아래 모두 모여 옛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이 노인이 되어 마을 후손들에게 이야기보따리를 풀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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