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을 맡으면 교실에 커다란 공책을 두고 아이들에게 일기를 쓰게 한다. 그냥 그날 있었던 일, 한 주일에 한두 번 씩 스스로 하는 아침조례, 담임이나 친구들에 대한 불만이나 하고 싶은 말, 만화도 낙서도 좋다고 한다. 아주 가끔은 그 글 밑에 내가 꼬리말을 달기도 한다. 이렇게 모은 학급일기를 학년말에 학급문집의 뼈대로 삼는다.학급문집 편집위원이 ‘10년 후 우리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는 글을 내라고 했다. 그 내용 가운데 한 부분이다.▶‘아! 됐어요. 모두 제 잘못입니다. 반성할게요.’ --> ‘아 XX 내가 뭐 잘못했다는 거야. 그렇지만 어째. 따지려니 말빨(?) 안서고 괜히 한 대 더 맞을 테니 잘못했다고 말해 주자. 뭐 하긴 불쌍하기도 하잖아. 내게 잔소리 안 할 수도 없을 테고.’ --> ‘아, X됐다. 그냥 손바닥 맞을 걸.’ 이렇게 했던 것 10년 후에도 기억할까? 뭐 20대도 이제 끝나가는 데 더 투덜거릴 일 없겠지. 하하. 진용아. 한 번 부반장은 영원한 부반장. 힘내어 잘 살자!▶반쯤 흘러내리다 만 바지 차림 아직도 안 바뀌었구나. 경수 행님. 사업이 잘 되어 벌써 애기 아빠? 설마? 뭐 삼남 삼녀 낳아 국가에 충성할 수도 있겠지. 격파 사건 반성문을 여기 올릴까? ㅎ ㅎ 좀 심했나▶아~! 샘요, 그기 아인데. 샘, 팔씨름 한 번 할까요? 제 팔뚝도 이제 더 굵어졌는데. 하하, 규현아. 이제 선생님 환갑이다. 규현인 여전히 축구 좋아해서 조기축구회에서 열심히 뛸 테고. 어머니도 이제 일어나셨겠지. 효자 규현이 힘내라. 힘!▶미경아. 학교 문 일찍 나가는 바람에 검정고시 준비하고 치른다고 힘들었겠구나. 그래도 혼자 힘들게 이겨 냈으니 대단하다. 아버지 잘 계시고 언니랑 동생도 잘 있다고? 당연히 그래야지. 늘 꿋꿋하게 잘 이겨나가렴.▶문집 만드느라고 가람이, 이슬이, 소운이랑 애썼는데 10년 지나 이렇게 보니 좋지? 가희 선배. 가희가 재수한 것도 아니니 여기서 선배라는 말은 선비의 옛말이겠지. 재재재재 말은 많지만 선비처럼 점잖고 아는 것 많고 무슨 일이든 잘 하던 가희. 고고학, 고미술학계의 신성으로 자라고 있다니 좋은 일이다.▶‘잘 살자!’ ‘관심 갖기’를 열심히 주장하던 선생님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 하하, 벌써 환갑이구나. 이젠 검은 머리 하나 없어 완전히 백수(흰머리)가 되었구나. 늙으면 다시 애 된다던데. 샘 얼굴 어떻게 바뀌었을까 궁금하지? 그럼 한 번 학교로 와 봐라. 그때면 샘이 맥주 한 잔이야 살 수 있지 않겠니. 술 안 먹는다고? 그럼 차라도 한 잔 살게. 좀 깨끗하게 늙고 싶다던 샘 희망을 얼마나 이루었을까. 궁금하지?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 선생님이 걸어 오신다.
회초리를 드시고
선생님은 낙타처럼 늙으셨다.
늦은 봄 햇살을 등에 지고
낙타는 항시 추억한다.
옛날에 옛날에
낙타는 어린 시절 선생님처럼 늙었다.
나도 따뜻한 봄볕을 등에 지고
금잔디 위에서 낙타를 본다.
내가 여윈 동심의 옛 이야기가
여기 저기
떨어져 있음직한 동물원의 오후
이한직의 「낙타」전문
‘선생님 = 낙타 = 나’로 동일화시키고 있다. 늙은 낙타의 모습에서 늙은 은사의 모습을 연상하고 연민의 정을 느끼는데, 이것은 동심의 세계를 잃고 메마른 삶을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기도 하다. 반백년 살고 보니 10년 참 잠깐이다. 문학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