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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선비들의 오랜 벗, 회현마을 느티나무..
사회

선비들의 오랜 벗, 회현마을 느티나무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7/01/30 00:00 수정 2007.01.30 00:00

양산노거수 이야기-  더불어 사는 큰나무

마을마다 사연을 가진 나무들이 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이 땅을 지켜온 큰 나무들. 지난해 지역신문발전기금 저술사업을 통해 양산 곳곳에 우리 삶을 지켜온 큰 나무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책으로 엮어보았습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온 큰 나무들의 새 의미를 2007년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할 양산시민들과 함께 다시금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지면을 통해 나누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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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로 모일 회(會)에 현명할 현(賢)을 쓰니 현명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외지에서 이사를 많이 온지라 외지인은 당산나무를 잘 모르지만 토박이치고 당산나무를 모르는 이는 없다. 살아서는 마을을 나서거나 돌아올 때, 죽어 마을을 떠날 때도 반드시 상여가 멈췄다 가는 곳이다. 그러니 당산나무가 마을의 산 증인이요 역사라 할 것이다.

오백년 여기 서 있는 동안
한번은 당신 샛별로 오고
한번은 당신 소나기로 오고
그때마다 가시는 길 바라보느라
이렇게 많은 가지를 뻗었답니다.

오백년 여기 서 있는 동안
한번은 당신 나그네로 오고
한번은 당신 남의 임으로 오고
그때마다 아픔을 숨기느라
이렇게 많은 옹이를 남겼답니다.

오늘 연초록 잎벌레로 오신 당신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이렇게 많은 잎을 피웠답니다.
        최영철 시 ‘인연’

 

공설운동장을 끼고 돌다 신시가지를 버리고 양산천 위에 걸린 영대교를 건너면 교동마을이다. 교동마을 향교에서 강서동사무소 쪽으로 방향을 틀어 양산여중·여고를 지나면 늠름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길을 막고 서 있다.

하루 종일 사람이 드나들고 차들이 오가는 길에 묵묵히 마을을 지키고 서 있는 당산나무가 있는 곳, 회현마을이다.  

회현, 한자로 모일 회(會)에 현명할 현(賢)을 쓰니 현명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바로 옆 마을 교동과의 경계가 어디서부터인지 모호해 처음 가는 사람은 어디가 교동이고 어디가 회현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향교가 있는 곳이 교동이요, 당산나무가 있는 곳이 회현이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외지에서 이사를 많이 온지라 외지인은 당산나무를 잘 모르지만 토박이치고 당산나무를 모르는 이는 없다. 그리고 회현마을에 살면서 당산나무를 지나지 않는 이 또한 없다. 살아서는 마을을 나서거나 돌아올 때, 죽어 마을을 떠날 때도 반드시 상여가 멈췄다 가는 곳이다.
그러니 당산나무가 마을의 산 증인이요 역사라 할 것이다. 

선비들의 마을, 회현
회현마을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곡포(曲浦)에 사람들이 정착했던 것으로 보아 그 무렵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조선 순조 28년 향교가 현 위치로 옮기면서 교생들이 모여들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향교 인근은 유림들이 모여 있다는 뜻의 회현(會賢)마을이 존재하고 있던 것으로 보아 조선조 이후부터 회현이라 불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회현마을은 행정상 교동과 분리되지만 두 마을을 떼어놓고 말하기는 어렵다. 특히나 70년대 이후 정부가 통제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마을들을 쪼개기 시작했던 터라 두 마을을 한 공동체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더구나 1992년 1월에 협성강변 아파트 자치관리운영위원회가 구성되고 74년 회현동에서 강변동이 분리된 것만 보아도 향교 인근 세 마을 모두를 한 마을로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회현 마을 인근엔 당산나무 뿐만 아니라 숲이 울창하고 문화재도 많다.
양산 시지에 따르면 1828년에 향교가 자리 잡았으며 이후 광무 10년에(1906년) 향교 명륜당에 사립 원명학교가 들어서는데 이는 양산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이었다. 또 춘추공원에는 삼조의열단(신라 박제상, 고려 김원현, 조선 조영규)을 모신 장충단이 있으며 장충단 뜰에는 이원수의 노래비 또 그 아래로는 3.1 독립투사 윤현진의 비와 신라 김서현 장군 기적비가 있다. 한편 친일문학을 한 이원수 노래비와 3.1 독립투사비가 가까이 세워져 있어 언젠가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회현마을 앞은 본디 포구로써 양산읍민의 생필품을 교환하던 장소로 추측하고 있다. 곡포라고도 불리던 이곳은 가야와 신라의 경계지로 서로가 탐내던 지역이라 한다. 또 조선말엽 강가에는 유목정이란 주점이 있었으며 버드나무가 즐비해 양산의 풍류객들이 즐겨 찾았다 한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큰 가마니에 돌을 채워 징검다리를 만들어 통행했는데 비에 돌다리가 유실되면 사람을 업어 건네주고 품삯을 받는 이가 있었는데 이를 월천(越川)꾼이라고 불렀다 한다.

예부터 회현 마을은 선비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정월 대보름날이면 마을 주민 모두가 모여 마을 앞 당산할배 나무에 격식을 갖추고 몸을 정갈히 해 제를 올리고 있다.

양산천이 마을 앞을 흐르고 향교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리던 유서 깊은 마을 회현은 현대 들어 많은 풍상을 겪어 전형적인 농촌 풍경은 잃어버렸다.

당산나무, 그렇게 주기만 했다...
이런 세태의 변화는 당산나무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당산나무 바닥으로 소형 고압선을 깔았는데 블럭으로 덮여 있어 주위를 기울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다.

당산나무 옆을 흐르며 당산나무 줄기에 넉넉히 물 인심을 쓰던 개울은 시멘트로 뒤덮여 멱을 감고 가재를 잡던 기억은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더구나 당산나무를 보호한다며 나무 주위를 온통 블록으로 덮어 놓아 뿌리에게 갈 햇빛이며 빗물을 차단하고 있어 나무의 생명력에 지장을 주고 있다. 언젠가 한번은 나무에서 검은 덩어리들이 떨어져 내렸는데 주민들은 나무가 피를 흘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무 썩은 덩어리로 밝혀져 링겔을 꼽고 죽은 부분을 도려내는 수술을 해야 했다.

온갖 풍상에도 묵묵히 인고해온 당산나무, 잎을 피워 그늘을 드리우며 민초들의 땀을 씻어 주었고 집안에 궂은 일이라도 생기면 치성을 드리고 그러고 나면 마음의 평안을 얻어 다시 삶터로 나가게 하는 기운을 북돋아 주던 생명수였다. 그러나 고압선이 흐르고 시멘트와 블록으로 뒤덮여 당산나무는 숨을 쉬기에도 힘겨워한다.

무한히 사람에게 주기만 한 당산나무, 그러나 이젠 사람이 나무에게 생명력을 북돋아 주어야 할 상황이다. 당산나무가 회현마을 동구 밖을 지키며 수 백 년 내리내리 그 자리에 늘 푸르게

서 있게 하는 것,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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