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겨울이 너무 길다는 생각이 든다. 특별히 재미있는 일도 없고 따뜻한 소식도 없다. 역사소설이나 몇 권 읽을 생각으로 주문을 했지만 글자도 심드렁하니 영 재미가 없다. 텔레비전 화면은 너무 낡았다. 세상 소식이라는 것이 언제나 똑같아서 바뀌는 건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선행이든 악행이든 그 사건을 일으킨 사람의 이름만 다를 뿐이다. 이럴 땐 그림이 최고라고 한다.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면 되는 세상.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면 볼수록 좋아지는 세상이 거기 있으니 말이다. 인쇄한 박수근 화백 그림을 하나 사다가 걸어 놓고는 물끄러미 그걸 치어다보면서 나는 그 그림의 제목도 여러가지로 바꾸어 보곤 하는데 원래 제목인 「강변」도 좋지만은 「할머니」라든가 「손주」라는 제목을 붙여보아도 가슴이 알알한 것이 여간 좋은 게 아닙니다. 그러다가는 나도 모르게 한 가지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가 술을 드시러 저녁 무렵 외출할 때는 마당에 널린 빨래를 걷어다 개어 놓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 빨래를 개는 손이 참 커다랐었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장엄하기까지 한 것이어서 聖者의 그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는 멋쟁이이긴 멋쟁이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또한 참으로 궁금한 것은 그 커다란 손등 위에서 같이 꼼지락거렸을 햇빛들이며는 그가 죽은 후에 그를 쫓아갔는가 아니면 이승에 아직 남아서 어느 그러한, 장엄한 손길 위에 다시 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그가 마른 빨래를 개며 들었을지 모르는 뻐꾹새 소리 같은 것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궁금한 일들은 그러한 궁금한 일들입니다. 그가 가지고 갔을 가난이며 그리움 같은 것들은 다 무엇이 되어 오는지... 저녁이 되어 오는지... 가을이 되어 오는지... 궁금한 일들은 다 슬픈 일들입니다.
― 장석남,「궁금한 일-박수근의 그림에서」전문 시를 참 잘 썼다. 어려운 말 한마디 없이 존재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을 이리 잘 풀어 놓고 있으니 시인의 재주도 절묘하다. 솔직히 나는 이 시도 좋지만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몇 점 옮겨 놓고 싶은 심정이다.박완서 선생이 쓴 소설 <나목>을 가르칠 때 박수근이라는 화가를 모델로 했다는 설명만 하고 그의 그림 한번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이 참 미안하고 부끄럽다. 그의 그림이 얼마에 경매되었는가가 세인들의 관심거리가 되고 억대로 팔리는 그림을 그린 사람의 세계에 대해 외경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앉아있는 여인과 항아리> <빨래터> <강변> <귀로> <굴비> <나무와 두 여인> <노상> <시장 사람들> 과 같은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림이라고는 모르는 나 같은 사람도 이상한 평화를 느끼게 하는 마력이 있으니 희한한 일이다. 그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쩌면 나도 시 한편을 쓸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해 보기도 하는 것이다. 배정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