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하기 좋은 봄날, 벌써들 3.1절인 금요일부터 주말로 이어지는 황금연휴 나들이 계획이 한창이다. 점심을 먹고 나른함을 내 치려 북정고분군으로 산책을 나섰다. 봉분들이 따스한 햇살을 머금어 연초록으로 변해가는 잔디를 이불 삼아 몸을 뉘었다. 어린이들에게 놀이터로는 금상첨화였던 무덤, 하지만 인터넷에 정신을 빼앗긴 아이들은 이제 더 이상 무덤가에서 놀지 않는다. 헌데 고분군이 빼앗긴 게 어디 아이들뿐이랴.
45년간 조선을 통치했던 일제는 우리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도굴도 서슴지 않았다. 북정고분군이 소장하고 있던 국보급을 비롯한 수 백점의 유물들도 강탈했다. 그리곤 버젓이 동경국립박물관에 전시해 놓고 자기네 것 인양 하고 있다. 우리 문화재를 침탈해간 사유가 백제가 일본에 문화를 전래하기 훨씬 이전인 가야시대 때 자기 조상들이 한반도로 건너와 문화를 전파했다는 ‘임나본부설’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란다. 이는 조선을 영구적인 식민지로 기록하려는 오만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고분군에 앉았노라니 노래 한 소절이 떠올랐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지금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동요 ‘고향의 봄’이다. 이 노랫말을 지은 이가 바로 북정고분군 옆에서 태어난 이원수다. 아직도 기와집 서 너 채가 남아있는 마을 안길로 들어섰다. 지나가는 이에게 이원수 생가를 물으니 생뚱맞다는 표정으로 지나친다. 하기사 이원수는 마산공립보통학교, 마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으니 난 곳은 양산이나 일찍이 대처로 나간 모양이라 생가도 이원수를 기억하는 이도 없을 것이다. 이원수는 1926년 방정환이 주재하는 ‘어린이’에 ‘고향의 봄’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윤석중 등과 ‘기쁨사’ 동인으로 활동하며 박문출판사 편집장, 한국아동문학회 창립과 더불어 부회장을 맡았으며 한국문인협회 창립회장 등을 지냈다. 그는 어린이들에게는 동심을, 어른들에겐 정감 넘치는 고향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예쁜 노랫말로 그리고 한국 문학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문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아는 이원수의 삶이다. 하지만 그가 일제에 부역한 친일문인임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는 ‘우리도 자라서, 어서 자라서/ 소원의 군인이 되겠습니다 / 굿센 일본 병정이 되겠습니다’ 며 조선 젊은이들에게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지원병이 되라고 선동했다.(시, 지원병을 보내며). 뿐만 아니다. ‘낙하산’, ‘젊은 농부의 노래’, ‘고도감회’ ‘전시하 농촌아동과 아동문화 등 친일작품들을 꽤 여럿 남겼다. 시에서 가칭 고분군 박물관과 이원수 문학관을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박물관을 세우려면 전시품이 있어야 하는데 정작 전시 할 유물은 대부분 일본에 있다. 더구나 그들은 우리 유물을 돌려줄 생각이 전혀 없다. 따라서 우선 박물관 건립에 앞서 빼앗긴 유물을 되찾아 오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이를 위해 지난해 양산시와 문화원이 의욕적으로 나섰으나 유야무야 되고 있는 북정군유물되찾기 범시민운동을 이제라도 다시금 가동시켜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원수 문학관 또한 건립에 앞서 반드시 전재돼야 할 것이 있다. 고향의 봄을 비롯한 그의 문학 세계를 보전하는 것은 동의 하지만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일본천황을 위해 목숨 바치러 전쟁터로 나가라고 선동했던 그의 오점 또한 함께 전시돼야 한다. 그것이 아직 외세에 짓눌려 아직도 진정한 민족해방과 자긍심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빼앗긴 들에 봄을 돌려주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