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애가 유치원에 갓 입학한 다섯 살 즈음에 대구에 갔었을 때다.“이모야? 오늘 대구 장날이야?”
“에이, 촌닭아. 촌에나 장날이 있지. 도시엔 늘 이래”
“알았어. 도시닭 이모. 닭은 촌닭이 훨씬 비싼데”
“뭐라고?”
“이모야가 날더러 촌닭이라며”
“하하, 이랬는데”
“아빤 장에만 오면 그 소리야”솥발산 공원묘지. 차 올라갈 수 있는 끝까지 올라가 차를 세웠다. 멀리 울산, 언양이 보이고 거기서부터 긴 강물처럼 마을과 논밭이 흘러 흐릿한 양산 시내 그 너머로 낙동강이 보이는 듯하다.“묘지가 내려다보니 꼭 초밥 엎어 둔 것 같아. 산소 앞에 세워 둔 조화 때문에 오히려 환하고 밝아 좋네”
“언젠간 다 저렇게 가겠지 뭐”
할아버지 산소를 찾은 듯,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에 초등학생 쯤 된 딸, 아들이 산소 앞에 둘러 앉아 싸 온 김밥을 먹고 있다. 그 모습이 참 따뜻하다. 통도사 천왕문 들어서니 천왕문 옆 늙은 매화나무가 제 몸을 헐어 몇 송이 꽃등을 달고 있었다.“늙은 둥치에 새순 돋아 매화는 늙어갈수록 매화는 더 깊이 견성(見性)한다”
“아빠가 견성(見性)했어?”
“……”
“보지 못했다면 그런 말 쉽게 쓰지 마”
“우와, 우리 딸 무섭네”
“눈은 손보다 훨씬 높잖아. 히히”해마다 4월이면 쌀 떨어진 집부터 살구꽃이 피었다 / 살구꽃은 간지럽게 한 송이씩 차례대로 피는 것이 아니라 튀밥처럼, 겨우내 살구나무 몸통을 오르내리며 뜨겁게 제 몸을 달군 것들이 동시에 펑, 하고 터녀 나오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검은 눈망울을 단 아이들이 맨발로 흙밭을 뒹구는 한낮에 피는 것이 아니었다 / 살구꽃은 낮은 지붕의 처마 밑으로 어둠이 고이고, 그 어둠이 꾸벅꾸벅 조는 한밤중에 손님처럼 가만히 피어나는 것이었다 / 그리하여 새벽이 오면 오갈 데 없는 별들의 따뜻한 거처가 되어 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이 핀 아침이면 마을 여기저기에서 쌀독 긁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 바닥의 깊이를 아는 사람들은 서둘러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굴뚝의 깊이만큼 허기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 살구꽃은 안쓰럽게 몇 개의 잎을 떨구어 주곤 하는 것이었다 / 그렇다고 해서 살구꽃이 함부로 제 몸을 털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 살구꽃은 뜰에 나와 앉은 노인들처럼 하루 종일 햇살로 아랫배를 채우며 시간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 살구꽃은 제 몸의 모든 기운을 한곳으로 모아 열매를 맺고 난 뒤, 열매가 단단하게 가지 끝에 매달린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타깝게 지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살구나무 아래에서 흙장난을 하며 놀던 아이들의 얼굴 위로 지는 것이었다 / 그러면 아이들은 풋살구를 털 때까지 얼굴 가득 버짐 같은 살구꽃을 달고 잠이 드는 것이었다
문신의 「살구꽃」전문이런 살구꽃 본 적 없는,
“오늘이 서울 장날이야?”
이젠 다시 이렇게 묻지 않을 큰놈이 내일이면 서울로 간다.문학철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