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이 땅을 지켜온 큰 나무들. 지난해 지역신문발전기금 저술사업을 통해 양산 곳곳에 우리 삶을 지켜온 큰 나무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책으로 엮어보았습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온 큰 나무들의 새 의미를 2007년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할 양산시민들과 함께 다시금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지면을 통해 나누려고 합니다-----------------8. 중부동 팽나무중부동 삼동마을과 일동마을 대나무 숲을 지나면 오랜 세월 마을을 지키고 있는 어르신을 만날수 있다.
경부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앞뜰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마을을 수호하며 마을 사람들의 할아버지로 남아 있는 팽나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지금은 마을에 외지인들이 늘어 아는 사람이 드물지만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 논밭으로 둘러싸인 곳에 의연히 서 있던 팽나무는 중부동 삼동마을과 일동마을 주민들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성시되던 나무였다.
시청에서 양산초등학교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중부동고분군·북부동산성 700m>라는 표지판과 함께 경부고속도로 아래를 뚫는 지하통로가 있다. 이 통로를 지나 계단을 따라 몇 걸음 옮기면 계원사 표지판과 고속도로 옆에 있는 양산 정류장이 나오고 양산 정류장을 스쳐 고추밭과 대나무 숲을 지나면 중부동 일동마을과 삼동마을의 제일가는 어르신을 만날 수 있다.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앞뜰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마을을 수호하며 마을 사람들의 할아버지로 남아 있는 팽나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팽나무는 당산할아버지 나무로 나이 380살에 키 20m, 가슴둘레가 7m이며, 고속도로 언덕 위에 고즈넉이 앉아서 가까이는 고속도로와 일동마을, 삼동마을을 바라보고 멀리는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와 종합운동장 등 급변하고 있는 시내와 양산천이 가로지르는 서쪽의 물금까지 유유히 바라보며 세월을 보내고 있다.지금은 마을에 외지인들이 늘어 아는 사람이 드물지만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 논밭으로 둘러싸인 곳에 의연히 서 있던 팽나무는 중부동 일동마을과 삼동마을 주민들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성시되던 나무였다. 마을을 하나로 이어준 나무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동마을과 삼동마을 주민들은 매년 번갈아 가며 3월 3일 팽나무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내왔다.
마을에서 가장 정갈하고 우환과 부정이 없는 집을 선출해 당산제를 올리도록 했으며, 그 집의 제주는 날이 정해진 날부터 매일 목욕재계를 하며 병자나 부정이 있는 자를 멀리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세월이 지나 외지인이 늘면서 몇 해 전부터 제를 올리는 의식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매일 당산 나무 앞에는 무속인들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마을의 평화를 빌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은제기 3개와 불을 밝히고 있는 촛불이 놓여 있다.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마을과 동떨어져 각종 소음과 매연 속에서 태풍을 몸으로 막으며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는 팽나무는 사람이 야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마을 사람들을 위해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을 어르신들이 말하는 당산나무는 어릴 적 놀이터이자 땀 흘리며 농사일을 하다가 넓은 그늘 아래서 달콤한 단잠에 빠질 수 있는 정자나무이기도 했다.
당산할아버지의 마음이 어찌나 넓은지 마을을 포용하고 마을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공기 맛 좋은 등산로”당산나무가 있는 뒤편으로는 계원사와 중부동 고분군과 북부동 산성이 있어 마을 주민들의 등산코스로 각광받고 있다.표지판을 따라가면 계원사가 나오고 등산로가 펼쳐지는데 북부동 산성이 있던 자리라 왜인들을 막기 위해 애썼던 지난 역사의 흔적과 기운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발걸음이 숙연해진다.
북부동 산성을 가기 위해서는 계원사를 지나는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등산코스를 꿰고 있는 사람들은 당산나무를 지나 펼쳐지는 텃밭 샛길을 더 선호하기도 한다.이 밖에 현재 산성의 아래쪽에는 중부동 고분군이 있는데 곳곳에서 삼국시기에서 통일 신라시기에 이르는 토기의 파편들이 발견된다. 산성의 정상부에서도 생활 토기의 파편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대체로 능선이 높은 곳에는 대형고분군이 아래쪽으로는 작은 고분군들이 밀집해 있다. 짧은목단지, 굽다리접시, 큰항아리 등의 파편이 채집되고 있는데 이러한 유물들로 보아 대개 5~6세기경의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산나무와 까마귀떼수백 년을 살아온 만큼 당산나무에는 작은 전설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수십 년 전 당산나무 주변이 나무와 밭으로 무성할 때는 수십 마리의 까마귀 떼들이 신기할 정도로 당산나무만을 맴돌았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까마귀를 귀신까마귀라고 불렀다.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이유는 유난히 까마귀들이 목청 높여 우는 날이면 얼마 되지 않아 마을에 우환이 꼭 생겼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듣고 ‘아, 저 집 할머니가 며칠째 누워계신데 곧 돌아가시겠구나’, ‘또 어느 집에 우환이 생기겠구나’하며 마을의 병고나 초상, 악재를 점쳤다고 한다.
그래서 까마귀가 울면 아픈 이가 있는 집은 무당을 찾아 당산나무 앞에서 온갖 정성을 들여 굿을 했고 그러고 나면 아픈 것이 신기할 정도로 싹 나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에게는 삶의 터전을 보살펴주는 최고의 어르신인 할아버지의 제가 올려지는 날에는 온 마을이 축제분위기로 들썩인다. 3월 3일 당산제가 이뤄지는 날에는 마을 사람들은 징을 치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돈과 쌀을 거두면서 나무 앞에 받칠 음식과 정성을 들일 돈을 마련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면서 당산제가 잊혀져 가고 있어 안타깝기도 하다. 예전엔 집 밖을 나서면 모두들 살림살이와 가족의 대소사를 훤히 알 정도로 살갑게 살아왔기에 인사 나누기 바빴지만 이젠 집 앞을 나와도 웬만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400여년이 되어가는 팽나무 한그루가 다가갈 수 없는 그리운 마음을 안은 채 고속도로 너머의 마을을 쓸쓸히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