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힘을 주어도 안되고 약해도 안된다. 빨라도 안되고 느려도 안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야 한다. 붓을 적시고 글을 쓴다. 힘을 줄 땐 힘주고 빠를 땐 빠르고 느릴 땐 느리고 멈추어야 할 땐 멈춰야 한다. 대강 그으면 획도 대강 나오고 끝까지 정성을 들여도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 흰 화선지에 붓으로 글을 쓰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흰 여백을 채워나가는 우리네 삶과 닮았다.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글을 쓰는 순간 무아지경에 빠지며 세상 번뇌 속에서 멀어진다. 반 백년이 넘는 인생살이 속에서 세상과 싸우고 나를 다스리는 법을 먹을 갈고 붓을 듦으로써 배웠다는 어르신들이 모인 곳, ‘양산 서도회’다. 서산대사의 발걸음처럼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 불수호난행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눈 내린 벌판을 밟아갈 때에는
그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말라
오늘 걸어가는 나의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라흰 눈밭을 걷는 서산대사의 조심스런 발걸음처럼 서도회 회원들은 양산문화의 맥을 이어간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기에 언제나 그 몸가짐이 조심스럽다. 이렇게 선조들의 얼을 계승하고 시민들의 정신문화를 성숙하게 하는데 보탬이 되고자 지역에서 서예를 사랑하는 원로들이 모여 서예의 저변확대를 위해 힘쓴 것이 올해로 벌써 10년째다. 신경찬 회장은 “서예는 단순히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씨자체가 지니고 있는 뜻과 내면에 담겨있는 철학적인 뜻을 아름다운 형태로 표현해내는 예술입니다. 좋은 예술은 몸과 마음을 즐거움으로 가득차게 하고 삶을 윤택하게 하죠”라며 서예의 매력에 빠져보라고 권한다.서도회는 지난해까지 8번의 회원전을 가졌다. 매년 삽량문화축전과 회원전을 함께 준비해 전시실을 찾는 시민들에게 무료로 가훈을 써주고, 학생휘호대회를 통해 서예의 매력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덕분에 이제는 나서지 않아도 가훈을 써달라고 아이들 손을 잡고 오는 시민들이 많아져 보람을 느낀다고. 먹을 갈다보면 무아지경에 빠지게 된다는 김병희(76)씨는 “사람이 살면서 욕심이 없을 수는 없죠. 하지만 자기 분수를 알고 욕심을 부려야 하는 겁니다. 30년 서예생활은 내게 꼭 필요한 욕심만 부리게 하는 법을 가르쳐 줬어요”라며 다시 붓을 든다.지금까지는 서예 강의를 희망자만 받아서 최소경비만 부담했는데 앞으로는 정기적인 서예교실을 운영해 매달 1번씩이라도 회원을 모집해 시민들 속으로 서예가 스며들었으면 좋겠다는 회원들.신경찬 회장은 아직까지 서예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한 점이 아쉽다며 “미술협회에서 서예가 분리되면서 서예가 활성기를 맞았지만 정작 서예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도는 떨어져 사실 운영은 더 어렵습니다”라며 시에서 문화원과 연계해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