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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각(刻)을 하며
사회

각(刻)을 하며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7/03/13 00:00 수정 2007.03.13 00:00

요즘 토요일이면 본절(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딸려 있는 서각반에 등록해서 나무 판에 글 새기는 것을 배우고 있다. 처음엔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속에 엇갈린 빗금을 새겼다.

그러고 나서 나옹화상의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를 받아 음각했다. 이어서 받은 것이 화엄경 한 구절이다.

“아유일권경(我有一卷經) /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내게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 종이와 먹이 필요치 않네. / 펼쳐봐도 한 글자 없으나 / 늘 큰 밝음(대광명)에 열려 있네”

토요일에 가서 서너 시간 새기는데 한 시간에 한 글자 남짓 새기니 색깔까지 넣어 다 만드는데 한 달포 걸릴 것이다. 지난 설에 세배 갔더니 관장 스님이 세뱃돈을 나눠주며 했던 말이 생각난다.

“각(刻)이 좋은 게 각을 하는 동안 세상 모든 것 다 잊고 오로지 집중할 뿐만 아니라 그 집중하는 것이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라 더 좋은 게야”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 꽃 지기 전에 놀러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 나는 끝내 놀러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나 왔어. / 문 열고 들어서면 /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 이봐, 어서 나와. /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 조등(弔燈) 하나 /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 너무 늦게 놀러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나희덕의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전문

친구의 부음을 듣고, 한 번 놀러오라던 친구의 전화를 받고도 가보지 못했던 자신의 무심함을 떠올리며 그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목련이 피고 지는 것을 삶과 죽음의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과 친구와 나누는 대화체를 그대로 사용하여 화자의 슬픔과 안타까운 정서를 잘 드러낸 시다.

“삶과 죽음의 길은 / 여기에 있음에 두려워 머뭇거리고 / 나는 간다는 말도 / 못 다 이르고 갔는가. /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 여기저기 떨어질 잎처럼 / 한 가지에 나고 / 가는 곳 모르겠구나. / 아아, 미타찰(서방정토)에서 만나 볼 나 / 도(道)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젊은 누이의 제일(祭日)에 월명사는 「제망매가(祭亡妹歌)」에서,

라고 하여 죽음에 직면한 슬픔에만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도 닦음)을 통해 새로이 승화된 삶의 만남으로 열고 있다. 이에 비해 나희덕 시인은 친구의 죽음을 듣고 친구의 죽음에 직면한 슬픔만을 형상화하고 있다. 시인만 이럴까. 신심(믿음)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삶은 얼마나 유한한 것인가. 죽음을 앞에 둘 때 현대인은 얼마나 깊은 심연 앞에 서게 되는가.

내 마음(經)엔 얼마나 많은 낙서가 들어 있을까. 죽음의 심연 앞에서 자유로워지지는 못하더라도 각(刻)을 하면서 마음 가득 어지러운 낙서를 조금이라도 지웠으면 좋겠다.

문학철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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