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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도심속 멈춰버린 세월, 덕계리 팽나무..
사회

도심속 멈춰버린 세월, 덕계리 팽나무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7/03/13 00:00 수정 2007.03.13 00:00

양산노거수 이야기-  더불어 사는 큰나무

마을마다 사연을 가진 나무들이 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이 땅을 지켜온 큰 나무들. 지난해 지역신문발전기금 저술사업을 통해 양산 곳곳에 우리 삶을 지켜온 큰 나무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책으로 엮어보았습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온 큰 나무들의 새 의미를 2007년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할 양산시민들과 함께 다시금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지면을 통해 나누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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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곳에는 나무가 있다. 집 마당에 심어 놓은 작은 나무도 아니요, 거리마다 심어져 있는 가로수도 아니다. 나무는 하늘을 움켜 쥘 듯 가지를 뻗고 있는 커다란 팽나무다.
 웅상읍 덕계리 749번지 일대에는 덕계마을 당산나무인 팽나무가 있다. 나무의 나이도 어느덧 300살을 훌쩍 넘겼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나무는 수많은 가지를 뻗었다. 10여개의 굵은 가지에서 뻗어 나온 가느다란 가지들은 저마다 달고 있는 잎사귀를 나부끼며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특별취재팀

 

웅상읍 덕계리 중심부 거리는 언제나 시끌벅적하다. 각종 상가와 식당, 금융기관이 밀집해 있어 늘 사람들로 붐빈다. 덕계리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도로에는 자동차의 시끄러운 엔진소리가 가득하고,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바쁜 발걸음을 옮긴다. 밤이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반짝이고 거리의 가로등도 늦은 밤까지 꺼질 줄을 모른다. 그 속에서 조용하고 자그마한 마을이었던 덕계(德溪)마을의 모습은 이제는 찾아 볼 수 없다.

삼한시대 우시산국(于尸山國)이 있었다. 우시산국은 신라시대에는 우풍현(虞風縣)으로 고려시대에는 흥려부(興麗府)라고 불리다가 울산군(蔚山郡)으로 개명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울산군 서면(西面)으로 불렸다가 다시 웅촌면(熊村面)이 됐다. 이후 한말에 와서 웅촌면을 웅상면과 웅하면으로 분할하면서 웅상면은 양산군에 편입되었으며, 1917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덕계마을(구덕계마을 포함), 외산(外山)마을, 조평(鳥坪)마을, 월라(月羅)마을을 병합하면서 현재 명칭인 덕계리로 불리게 됐다.

도심 속 멈춰버린 시간

시간은 마음의 여유 한 점 없이 숨 가쁘게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과 맞물려 빠르게 흘러간다. 하지만 쉴 새 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시계가 멈춰버린 듯 정지한 곳이 있다. 그 곳에는 나무가 있다. 집 마당에 심어 놓은 작은 나무도 아니요, 거리마다 심어져 있는 가로수도 아니다. 나무는 하늘을 움켜 쥘 듯 가지를 뻗고 있는 커다란 팽나무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무는 어느덧 정지된 시간이 되었다.      

현재 웅상읍 덕계출장소가 자리하고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100여m가량 떨어진 곳. 웅상읍 덕계리 749번지 일대에는 덕계마을 당산나무인 팽나무가 있다.

나무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당산나무는 덕계출장소 옆에 있다’는 얘기만 듣고 무작정 찾아 갔다. 하지만 멀리서 얼핏 봐도 ‘저 나무가 바로 당산나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도심 한가운데 둘레 4.8m, 높이 21m에 달하는 커다란 팽나무가 떡 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그 생각은 너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지금이야 워낙 높은 건물도 많고, 당산나무 주변만 하더라도 5~6층 건물이 줄지어 세워져 있으니 당산나무의 크기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을에 나지막한 초가만 있었던 시절, 당시 당산나무의 위풍당당한 풍채는 능히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의미를 잃어 가는 당산나무

팽나무는 느티나무와 함께 마을 주변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향토수종이다. 수세(樹勢)가 강건하고 입지에 대한 요구가 까다롭지 않으며, 맹아력(식물에 새로 싹이 트는 힘)이 좋다.

팽나무인 덕계 당산나무의 나이도 어느덧 300살을 훌쩍 넘겼다. 줄기에서 뻗은 가지는 다시 가지를 뻗고, 그 가지는 또 다시 가지를 뻗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나무는 수많은 가지를 뻗었다. 10여개의 굵은 가지에서 뻗어 나온 가느다란 가지들은 저마다 달고 있는 잎사귀를 나부끼며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는 몇몇 부러진 가지들도 보인다. 가지가 거리로 뻗어 나오자 사람들이 통행에 방해가 된다며 잘라버린 것이다. 팽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기가 찰 노릇이다. 그도 그럴 것이 팽나무는 당산나무다. 예로부터 마을 사람들이 신성시하며 마을의 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祭)를 올리던 나무인 것이다.

이렇듯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토속신앙에 대한 믿음도 많이 약해졌다. 하지만 아직 당산나무에 제를 올리는 전통이 약하게나마 그 명맥을 이어오고는 있다. 아직도 마을 사람들은 정월 보름이면 당산나무에 제를 올린다고 한다. 나무 뒤편 밑동 앞에는 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돌로 만든 작은 제단이 있다.    

하지만 정월 보름에 제를 올리는 날을 제외하면 당산나무는 이미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교환하던 광장으로서의 역할도, 장기 두는 어르신들이나 한창 일을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청년들, 여름 땡볕에 뛰놀다 지친 철없는 개구쟁이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펼쳐주던 후덕한 모습도 찾을 수 없다.

지금은 사방이 슬레이트 벽으로 막힌 겨우 두 평 남짓밖에 안 되는 좁은 자리를 차지하고 힘겨운 듯 가지를 펼치고 있다. 도심 한가운데 금사라기 땅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덕계마을 당산나무인 팽나무는 양산의 노거수(老巨樹)들이 보호수로 일괄 지정되던 지난 1982년 11월 10일 보호수로 지정됐다. 하지만 여러 보호수들이 그렇듯 보호수로 지정만 해놓았을 뿐 제대로 된 관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나무 앞으로 녹슬어 버린 보호수 표지판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친구 같은 나무가 되기를

온 몸 썩히어
갖은 풍상
삭이고 서 있는

상처마다 피워 올린
녹야청청의 마음, 오늘은
낙엽으로 또 버티나니

한 生 
청청함으로 남는
내 마음 속 지주목입니다.

강대실의 詩 <노거수>에서

 

당산나무는 오랜 세월 덕계마을을 지켜왔다. 마을 사람들이 기쁠 때에도 슬플 때에도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애환을 말없이 삭이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그렇게 당산나무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지만 더 멀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철없는 개구쟁이들이 믿음직한 청년이 되어 갈 때에도, 그 청년이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을 때에도, 세월의 무게에 이마에 한 가닥씩 주름이 늘어갈 때에도 나무는 한결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당산나무는 친구 같은 존재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고 더위에 지쳐 달려갔을 때 제 몸에 있는 그늘을 허락해 주는 친구. 나무는 결코 자신을 위해 그늘을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당산나무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찾지 않는 친구가 야속할 만도 하다.

당산나무에 대한 토속신앙이 많이 도태된 지금, 당산나무는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 물론 300여년이 넘는 세월을 한 자리에서 굳건히 지키고 선 당산나무를 쉽사리 베어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당산나무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당산나무는 의미를 잃게 된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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