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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살가운 고향집 풍경을 가진
지나마을 느티나무..
사회

살가운 고향집 풍경을 가진
지나마을 느티나무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7/04/03 00:00 수정 2007.04.03 00:00

11. 원동면 화제리 지나마을 느티나무

도시 깍쟁이들 마냥 호들갑을 떨 것 없이, 사부락 사부락 어린 시절 뛰놀던 골목길을 거닐거나, 느티나무 밑에서 가만히 낮잠을 즐기다가도 그만 옛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고향.
원동 화제리 지나마을은 그런 살가운 고향집 풍경을 그리고 있다.
이 곳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느티나무 또한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없는 이야기 주머니도 절로 열릴 것 같이 추억에 잠기게 된다. 금상첨화로 이 느티나무는 재미있는 마을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
특별취재팀 

원래 우리네 전통 촌락의 들머리에는 정자나무가 있었다.
나이 든 노인네가 곰팡대를 물고 장기 한판 두기도 하고, 일하다 지친 농군들이 모여 앉아 탁주 한 잔씩 하던 그곳 말이다. 그리고 그런 정자나무로써 제일은 역시 느티나무라 하겠다. 잎이 널리 퍼져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내고 몸통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듬직하면서도 기괴하게 뒤틀리기까지 한 느티나무를 보면 그 자체가 이야기가 된다.

게다가 진짜 이야기가 있는 고향집 느티나무라면 그 얼마나 감격인가?
화제초 지나마을에 있는 느티나무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없는 이야기 주머니도 절로 열릴 것 같이 추억에 잠기게 된다. 금상첨화로 이 느티나무는 재미있는 마을 이야기를 담고 있다.

네 그루 나무가 하나된 사연

화제리는 양산 8경 중 하나인 오봉산을 사이에 두고 물금읍과 경계한 곳으로 현재 외화마을, 내화마을, 지나마을, 명언마을, 토교마을 등 5개 자연마을로 형성되었다.

화제리에 처음 사람이 살았던 곳은 ‘동편’으로 이 이름은 당산이 있는 곳이라 하여 ‘당편’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약 500년전 당편이라는 곳에 영산 신씨(靈山 辛氏), 상주 주씨(尙州 周氏), 벽진 이씨(碧珍 李氏) 등이 촌락을 이루고 살았다. 하지만 마을이 화재 때문에 모두 타 신씨는 동쪽 고개 넘어 지금의 지나마을에 정착하고 이씨와 주씨는 서쪽 고개 넘어 서편에서 살게 되었다.

지나마을에 정착하게 된 신씨는 그곳에서 사는 이씨, 김씨, 최씨와 이웃사촌이 된 것을 기리고자 지금의 느티나무가 있는 자리에 나무 네 그루를 심으며 즐거운 잔치를 벌였다. 이후 정말 기이하게도 그 네 그루의 나무가 점점 가지가 뒤엉키더니 하나의 몸통으로 자라기 시작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이는 필시 마을 화합을 상징하는 것이다’며 하나의 몸통으로 자란 느티나무를 마을을 대표하는 당산나무로 정하고 매년 정월 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냈다고 전해 온다.

또 하나, 지나마을 사람들은 느티나무뿐 아니라 우물터 역시 성스럽게 여기고 있는데 이 역시도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지나마을에는 우물 두 개가 있었는데 유난히 우물물이 자주 말랐다고 한다. 그럴 때면 옛날 당편에 있던 샘물을 길어 우물에 넣으면 3일만 지나면 물이 다시 가득 고이곤 했다. 이 현상이 성스러워 마치 동제를 지내듯 우물터에 새끼줄을 달아 정성스럽게 우물을 나르곤 했다. 그래서인지 당편을 비롯한 화제리는 ‘사람을 기억하는 성스러운 땅’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포장공사로 가지 하나 잃어

지나마을 느티나무는 수령이 470년으로, 그 키는 대략 13m이고 가슴높이 둘레는 4.7m로 풍만한 몸체를 자랑한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처럼 느티나무의 가지는 선명하게 4개로 나뉘어 동서남북으로 힘차게 뻗어 있는 데 유독 한 가지만 끝까지 뻗어 있지 못하고 잘려나갔다.

이 가지의 슬픈 사연은 1970년도 새마을운동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새마을 운동의 하나로 흙길들을 모조리 시멘트로 덮는 포장도로공사가 한창이었다.  느티나무 옆 길도 마찬가지로 포장도로를 만들기 위해 시멘트로 덮기 시작했는데 설상가상으로 도로확장까지 강행했다고 한다.

이때 땅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느티나무 뿌리가 손상되었고 그 때문에 나무전체가 고사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네개의 가지 중 하나만 잘라내는 외과수술을 통해 목숨은 건졌다고. 그러니 그 가지는 다른 가지를 위해 살신성인 한 셈이다.

포장 이후 버스가 다니는 도로가 되었고 버스와 오가는 길손들로부터 느티나무를 보호하려고 주변에 팬스를 설치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의 정성어린 보살핌으로 느티나무는 다시금 생기를 찾게 되었고 1980년 9월에는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고향집 추억을 그린다

지나마을 느티나무는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제사비를 마련해 당산제를 지낸다. 옛날에는 당산제를 지내는 날을 기점으로 석달 전부터 당주는 불경한 행동을 하지 않고 하루에 한 번씩 목욕재계를 하는 등 까다로운 절차를 거쳤지만 요즘에는 하복천암의 스님을 당주로 모시고 제를 지낸다고 한다.

하지만 지나마을에서 자라 지금까지 고향을 지키는 신원식(72) 어르신에게 느티나무는 신성시되는 당목으로서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절친한 벗이자 든든한 형이라며 남다른 애정을 과시한다.

“느티나무 잎이 어찌나 무성하게 피던지, 하늘에서 퍼붓는 소나기도 피할 수 있었을 정도라니깐. 나무 아래면 무조건 든든했지.”
또 여름철에는 여느 시골집처럼 모기, 빈대 때문에 집안에서 잠을 청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마을 남자들이 저녁 무렵 밀짚으로 장판을 만들어 느티나무 밑에 삼삼오오 모여 함께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면 밤새 이슬 한 방울 맞지 않았다고 한다.

도시 깍쟁이들 마냥 호들갑을 떨 것 없이, 사부락 사부락 어린 시절 뛰놀던 골목길을 거닐거나, 느티나무 밑에서 가만히 낮잠을 즐기다가도 그만 옛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그런 고향.
내 부모를 만나러 가는 길처럼 마음을 열고 찾아가면 마냥 푸근하고 편안한 우리 부모세대들의 인정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지나마을 느티나무는 그런 살가운 고향집 풍경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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