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일본군 20만의 부산 상륙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심에서 출발돼 7년 전쟁 끝에 히데요시의 죽음으로(1598년 8월) 일단락됐다.전쟁이 끝난 후 황폐해진 조선은 일본과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적대감이 있었지만, 일본에 끌려간 사람들을 데려와야 하는 큰 과제를 안게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3년 애도막부 체제를 굳히고 쓰시마 도주(번주) 소 요시토시를 통해 통신사를 파견해주도록 조선에 3차례나 사신을 보냈으나 응답은 없었다.조선은 일본의 재침 의사를 파악하기 위해 의병장 사명대사 유정을 1604년 7월에 파견해 도쿠가와와 담판한다. 조선을 다시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1390명의 조선포로들을 데려왔다. 그리고 제 1차 조선통신사 파견(총 467명)은 여우길을 정사로 삼아 1607년 1월에 출발, 쓰시마를 거처 5월24일에 애도에 도착해 도쿠카와와 교섭, 조선인 포로 1418명과 함께 7월17일 한양으로 돌아왔다.그후 2차(1617년) 3차(1624년) 사절단까지 ‘회답 겸 쇄환사’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도쿠가와의 축하와 양국 간 우호, 친선을 다지며 포로를 귀환시키는 것이 중요한 임무였다. 4회 사절단(1636년)부터 12회 사절단(1811년)까지는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파견돼 조선의 많은 문물을 교류, 전파하는 민간교류가 됐다. 일본에서는 막부의 1년 예산이 쓰일 정도로 대단한 환영을 했으며 조선통신사의 다양한 재능을 가진 일행을 통해 한시와 글, 그림을 얻고 의학, 유학을 접하는 기회로 삼았다. 조선도 1764년 영조 40년에 정사 조엄이 다녀올 때(11회 통신사) 쓰시마에서 자라는 고구마가 흉년에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구해 줄 수 있는 작물이라 생각하고 종자를 들여와 제주도와 남부지방에서 처음 재배하게 돼 주요 식량이 될 수 있었다. 17세기 당시 웅상은 산골짝마다 일부 마을에 소수의 주민이 살고 있었을 때, 500여 명의 통신사 일행이 회야강을 따라 행렬이 지나가면 장관을 이루었다. 당시 자료 중 웅상 지역은 ‘용당’으로 표기돼 있으니 현재 용당을 거쳐 우불산 밑으로 지나 외홈, 덕계, 월평, 철마산 밑 송정리(영천)를 지나 동래로 갔다.그 당시 통신사의 구성원은 국서를 수행하는 인솔자 정사(상사)를 포함 부사, 종사관 등 삼사가 있고 통역관리(당상역관), 의원, 군관, 선장, 포수(포를 쏘는 사람), 사공, 풍악수, 재주꾼, 잡역부 등 300 명에서 500 명으로 이루어졌다.일본에서 그린 조선통신사 행렬도를 보면 선두에 기수단이 나서는데 길을 비키라는 청도기(靑道旗) 그리고 조선국왕의 상징인 용기(龍旗)가 나간다. 그리고 취타대가 각종 악기를 연주하면서 나가고 다음은 조선국왕의 외교문서인 국서(금서)함 행렬이 뒤따른다. 그 뒤에는 군관, 사령, 정사행렬(일본가마꾼 8명), 역관, 일본 경호무사 등을 포함한 1000여 명의 행렬은 일본사회의 대단한 이국적 볼거리였다.항해선단 규모는 가장 큰 배가 길이 33m 폭9m 높이 7.2m 크기로 돛은 2장을 달고 6척으로 이루어지며 현재 부산진에 있는 왜관에 대기하고 있던 쓰시마의 안내선을 따라 쓰시마 북단(부산에서 50Km)을 거쳐 쓰시마 남쪽 이즈하라항으로 가서 쉬고 다시 일본으로 갈 때는 50여 척의 선단이 따라 붙고 일본 내에서 이동 중에는 300여 척의 대 선단이 해상퍼레이드를 벌이면서 조선통신사 일행들을 특별대우했다고 한다. 영산대 겸임교수 성홍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