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언덕 자락에 텃밭 있는 나지막한 집 한 채 짓고 살았으면 좋겠네.”
밀 이삭은 아직 패지 않았지만 보리밭엔 희끗한 보리 허리통도 보이고 보리이삭이 바람결에 쓸리는 모습이 정겨웠다.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졌다. / 바람은 넘실 천(千)이랑 만(萬)이랑 /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 꾀꼬리는 여태 혼자 날아 볼 줄 모르나니 / 암컷이라 쫓길 뿐 / 수놈이라 쫓을 뿐 / 황금빛 난 길이 어지럴 뿐 /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 버리련?
김영랑의 「오월」전문 이제 아이들에게 들길은 마을에 들자 검어지고(아스팔트)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졌다고 해야 알아들을 것이다. 바람에 넘실거리는 천(千)이랑, 만(萬)이랑 보리밭은 이제 웬만한 시골에서는 볼 수 없다. 어쩌다 보이는 밀밭이나 보리밭은 들 한 귀퉁이에 겨우 붙어 있을 뿐이다. 노랑 꾀꼬리 날아간 자취가 황금빛으로 길이 나는 것을 보자니 자연에 꾀꼬리가 없다. 그래도 신록으로 환하게 단장한 산봉우리는 어깨 들썩이며 마을 옆에 서 있다.
집으로 돌아오니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중간고사 끝내고 5월 초에 한 번 내려온다고 한다.“내려오면 뭘 해 줄까?”
“집엔 방학 때나 갈 거야. 대구 할머니 댁에 내려간다고.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
이렇게 부모 자식 맘이 다르다.
“집 생각난다며 전화로 찔찔 짜거나, 주일마다 내려오면 어쩔 건데. 더 잘 됐지.” 사흘 낮 사흘 밤 봄비 젖어 내리더니 고샅길 따라 휘어진 무논에 파스텔톤 푸른 하늘이 깔렸다 그런데 솜방망이꽃 까치발하고 넘겨보는 저기 무슨 꿍꿍이가 있어 저리 환할까 무논 얕은 물 속에 서너 개 움푹 파인 황소 발자국 안 햇살 조밀조밀 아물아물 몰려 빛난다 / “파드득” 올챙이 한 마리 알껍질 뚫고 튀어나온다 하늘 한 자락이 술렁이고 낮달이 살풋 웃는다 // 저놈 애빌까 주먹만 한 두꺼비 한 마리 무심한 척 큰 눈 껌벅이며 지키고 앉아 있다 // “괜찮다 맨날 지게 지던 어깨라 그냥 걸으면 허전하구나” / 신작로까지 오리 길 한사코 당신이 지고 와서 버스 뒤쪽 뿌연 먼지 속 한 모롱이 돌아서고도 서 있던 아버지
拙詩 「고향의 봄」전문 내리사랑이라 했다. 어머니, 아버지 벌써 가신 지 오래지만 어머니, 아버지가 밑거름으로 썩어 내가 이렇게 땅 위에 뿌리 내리고 서 있고, 다시 내가 썩어 아이들 밑거름이 되고 있는 것 아닐까. 신록으로 아양 가득한 산봉우리. 산에 들어서면 발목이 빠질 부엽토로 온 산 가득할 것이다.문학철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