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21세기는 상공농사(商工農士)의 시대다.
이 시대 최고의 거상(巨商)을 기다리며… 우리 지역 상공인을 만나 그들의 상(商)에 대한 도(道)를 듣는다.-----------------------(주)성보수지 박영춘 대표(59)는 회갑의 나이를 앞두고도 사람 만나는 일이 아직 수줍은 모양이다. 기자와의 인터뷰 내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이야기를 이어가며 옛 생각이 떠오르는지 이마에 주름이 살풋 잡히기도 했다. 그 주름에서 그가 걸어온 삶의 여정이 결코 녹녹치 않았음을 느끼게 한다.흔히 많은 분들이 “내 라이프스토리를 소설로 쓰자면 수 십 권은 족히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현재 웅상지역 상공업연합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박영춘 사장은 “내 얘기는 별 것 없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내 삶의 터닝포인트
(turning point)는 ‘우연’▶ 성보수지에서 하는 일이 주로 ‘재생’ 사업인 걸로 압니다. 비닐하우스에서 사용하다 버린 폐비닐 같은 PP, PE 화학제품의 원료를 재활용, 재생산하는 것으로 아는데요. 혹시 대학 때 화학을 전공하셨거나 이런 방면으로 취미가 있으신가요? ▷ 아닙니다.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허허) 이 공장은 친척이 운영하던 것인데, 어느 날 나에게 경영해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그냥 그러자고 대답하는 바람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이 방면에 아무런 지식도 없으시면서 그냥 시작했다는 말이죠?▷ 그래요, 그냥... 우연히 시작된 일입니다.(박 사장은 옛 생각이 스치는지 잠시 응접실 밖,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린다. 성보수지는 300여 평 정도의 작업장 보다 운동장이 10배나 더 커 보인다. 담배를 한 개비 피워 물며 말을 잇는다.)처음부터 이 일을 시작한 게 아닙니다. 굳이 전공을 따지자면 ‘양복쟁이’입니다. 옷 만드는 일이 제 특기인 셈이죠. 손님의 사이즈를 재고, 원단을 재단해서 재봉까지, 양복 만드는 일을 20년 넘게 했습니다. 1급 기능사자격도 있구요, 부산 기능올림픽 대회 심사위원까지도 해봤습니다.(예사롭지 않은 경력이다 싶어 기자의 눈이 뜨악해졌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잖아요. 그때 양복점 이름을 ‘영테일러’라 지었어요. 영어로 젊다는 뜻이고, 내 이름에 맞이한다는 의미의 영, 그리고 아라비아 숫자 제로, 둥글다는 뜻, 이런 것들을 다 포함해 둥글둥글 원만하고 젊게 양복점을 운영해보자는 뜻이었지요. 어쩌면 내가 그렇게 살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살이 억지로 되는 일은 없어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둥글게 살자!▶ 지금 회장직을 맡고 계신 웅상상공업연합회 회원분들이 그러더라구요. ‘우리 회장님은 둥글둥글하신 분이다. 포용력이 탁월하신 분이다’라는 평을 하더라구요. 왜 그런 소릴 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군요. ▷ 포용력이랄 것까지 없습니다. 어쩌면 포용력이라기보다 ‘순응한다’는 표현이 맞지 싶습니다. 내 앞에 예상치 못한 일이 닥치면, 그것이 행운이든 액운이든 일단은 그냥 받아들이는 스타일입니다. 제가 반박하고 대항하고 악다구니하는 스타일이 못 되다 보니 그런 평을 하겠지요. 살아보니 세상살이 억지로 되는 법 없어요. 제가 20년 양복쟁이 생활 그만두고 시작한 것이 ‘구두쟁이’였는데요, 구두를 정성스레 만드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신을 손님의 발에 신겨주고, 손님한테 마음에도 없는 립서비스 하는 일은 영 껄끄럽더라구요.(웃음) 그래서 생각했죠. 나의 소질은 판매, 서비스 쪽이 아니라 생산이나 제조 쪽이 더 어울리겠구나,라고 판단한 거죠. 그래서 당장에 때려치웠습니다. 그 쪽으로 재주도 없고 재미도 없는 일을 억지로 해보겠다고 짧은 인생 끙끙거릴 필요 없잖아요. ‘한 우물을 파라’는 옛말.
지금은 큰 흐름을 탈 때!▶ 그렇다면 지금 하고 계신 일은 자신에게 딱 맞다고 생각하시나요?▷ 바로 이거다랄 것도 없지만, 아니라고도 못하겠습니다. 제가 20년 넘게 해오던 ‘양복쟁이’ 생활을 하루아침에 그만두면서 생각한 건데요. 역사를 봐도 그렇고, 문명사를 봐도 그렇고, ‘커다란 흐름’ 앞에서 일 개인의 능력이 얼마나 초라한가를 그때 느꼈습니다. IMF때도 그랬습니다.일개 기업인의 노력이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봤습니다. 기업을 살리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때는 안 됩니다. 6,70년대는 제법 부자들만 양복을 맞춰 입었고, 그때의 양복쟁이는 고급스런 직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경제가 고속 성장을 하기 시작할 때, 양복은 공장에서 대량생산체제로 들어갔습니다. 값 싸고 질 좋은 양복이 흘러 넘쳤죠. 그러자 저와 같은 소규모 동네 맞춤양복점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큰 흐름’이라는 겁니다. 지금의 한미FTA도 이와 마찬가집니다. 곧 웅상지역에 대형마트가 들어온답니다. 그러면 소형 구멍가게, 동네 재래시장은 ‘고향 앞으로’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렇게 생각하면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은 이제 빈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욕심이 경쟁을 부르고, 무엇이든
과(過)하면 부족한만 못해▶ 그렇군요. ‘큰 흐름’ 앞에 개인의 노력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실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사업은 전망이 어떻세요? 제가 듣기로는 사람이 없어 일을 못할 지경이라고 하던데요.▷ 바쁜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이 일을 3D직종이라고 그럽니다. 일손은 부족한데 일할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이런 업계에 외국인노동자들이 많이 유입됩니다. 저는 그렇게까지 해서 돈 벌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새벽종이 울렸네...잘 살아보세’ 운동으로 독일에 간호사들을 대량으로 수출한 일이 있습니다. 사우디에 건설노동자들을 파견한 것도 기억할 겁니다. 심지어 베트남 전쟁에도 목숨 떼어놓고 돈 벌러 나간 일이 있습니다. 말이 파견이고, 국가가 인증했다는 것뿐이지 심하게 말하면 ‘인신매매’나 다름없습니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낭만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국가가 하면 경제발전이고 애국이지만 개인이 하면 사람 팔아먹는 인신매매가 되는 겁니다. 돈만 벌면 장땡이라는 목적은 똑같으니까요.▶ 대표님이 이 말을 이십년 전에 하셨다면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갔을 겁니다. 그건 그렇구요. 보통 기업들은 공장이 팽팽 잘 돌아갈 때, 확장도 하고 생산량도 늘리고, 매출도 늘리고 해서 성장하려고 애를 쓰잖아요. ▷ 허허...그렇죠. 대한민국에 파견된 외국인노동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돈이 된다고 행복을 포기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일로 땀 흘려 자식농자 잘 지었고 남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제 스스로의 농사도 이만하면 만족합니다. 인도의 경우 인생 팔십을 스무살씩 네 단계로 나눠, 태어나 스무살까지는 열심히 먹고 배우고, 사십까지는 최선을 다해 자기 분야에서 뭔가를 이루고, 육십까지는 사회에 봉사, 환원하다가 팔십에 저 세상으로 가기 전에 차분히 나머지 인생을 깔끔하게 정리한다는 게 상식이라 하더군요. 제 나이 곧 환갑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하지만, 인도의 방식에 따르자면 정리할 시기입니다. 기업도 생물을 닮아서 라이프사이클이 있어요. 지금의 이 사업체는 성장기가 아니라 성숙기라고 봅니다. 사업주 간의 욕심은 경쟁을 부릅니다. 지나친 경쟁으로 확장에 몰두하면 둘 다 죽습니다. 무엇이든 과(過)하면 부족한만 못하니까요. 기업은 뿌린 데로 거둔다는
점에서 농사와 닮았다
▶ 근래 어느 매체에서 ‘당신은 무슨 재미로 사십니까?’ 라는 주제로 시장조사한 적이 있는데요. 의외로 ‘아이 키우는 재미’가 1위더라구요. 사업을 하시는 ‘재미’라면...▷ 그래요. 아이 키우는 재미가 첫째겠지요. 저는 남자애만 둘인데, 한 놈은 화공과를 나와서 LG필립스에 다니고, 한 놈은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큰 놈이 얼마 전 회사로부터 특별보너스를 받았다며 제 엄마 휴대폰 바꿔주고 제 동생 학비 하라고 돈을 건네더라구요.기특하지요, 이제 다 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둘 다 기술 쪽을 전공했으니 밥굶을 걱정은 없고, 저희 형제끼리 협력하여 사는 걸 보면 뿌듯합니다. 사업이랄 것도 없지만 땀 흘린 보람은 있지요.(허허) 박영춘 대표와의 대화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가슴 훈훈한 이야기가 너무 많지만 다음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과 지면을 탓하며 아쉬운 자리를 정리해야 했다.
박 대표는 헤어지기 아쉬운 듯 따라나오며 공장 뒤, 텃밭을 구경시켰다.공장 담벼락으로 좁게 난 텃밭에는 고추모종들이 보송보송 자라고 있었고, 물가로 잘 정리된 터에 길쭉길쭉 자란 보리 새순들도 어깨를 으쓱대고 있었다. 분명 부지런한 농부의 손길로 잘 다듬어진 텃밭이었다. 박 대표는 사과나무 가지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이놈이 지난해보다 꽃을 많이 피웠어요. 허허...”
기자는 속으로 ‘아하...사과가 많이 열린다는 뜻이구나, 열매맺을 쯤... 또 한번 찾아야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세월로 잡힌 그의 주름진 웃음에 인생선배의 연륜이 느껴졌다. 작은 거인이다 싶었다. 그리고 ‘자연 친화적인 사람...자연에 순응하는 사람...사업을 농사짓듯 하는 사람...’이라고 속으로 되뇌이며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