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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시가있는마을] 축 제
사회

[시가있는마을] 축 제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7/05/29 00:00 수정 2007.05.29 00:00

지난 ‘스승의 날’이 마침 박물관에 나가는 아내도 쉬는 화요일이어서 얼마 전 돌아가신 장인어른 묘소를 찾으려고 대구로 향했다. 평일 오전이라 고속도로는 시원스레 열려 있었다. 차창을 따라 신록의 눈부신 생명력이 파노라마로 흘러간다. 흘러 넘실대는 초록 생명의 넘실대는 바다 속을 시원스레 가로질러 가는 느낌이라 나도 모르게,

  “전생 후생이 어떠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내 금생은 이만하면 복 받은 삶이야” 했더니,
  “나도 그래. 아들, 딸 내게 과분하지. 당신도 내게 넘치게 좋은 사람이지. 돈 조금 모자란 것 말고 모자란 것 없잖아. 이 삶이 내게 과분한 축연이지” 한다.

 산다는 게 무얼까?
 김남조 시인은 「설일」에서 “삶은 언제나 /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 사랑도 매양 /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라고 하면서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 한 세상을 누리자”고 했다. 시인이 생각하는 삶이란 ‘축하 잔치를 누리는 것’이라는 말이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밤이 깊을수록 /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 이렇게 정다운 / 너 하나 나 하나는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
김광섭의 「저녁에」전문

 수많은 사람 중에서 너와 내가 만나 사랑으로 맺은 것은 우연이지만 그 우연은 운명적 우연이다. 만남과 사랑이 ‘우연’처럼 왔으니 헤어짐 또한 ‘우연’처럼 찾아 올 것이다.

지난 금요일, 토요일 양일간 학교 축제를 했다. 우리 반 관악부 학생 어머니가 연주를 듣고 난 다음,
 “Y 때문에 죽겠어요. 중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말 잘 들었는데 고등학교 들어온 후부터 말을 듣지 않아요” 한다.

  “좀 늦었지만 이제 사춘기가 되었나 보죠”
 아들이지만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집에 오면 이야기도 잘 하고 부모 말에 대꾸하는 일 없었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한 다음, 특히 관악부에 들어간 뒤로 말을 듣지 않더니 말없이 외박까지 두 번 했다는 것이다. 관악부 탓을 30분 정도 계속했다.

  “아들을 사람으로 키우고 싶으세요? 아님 애완동물로 키우고 싶으세요?”
  “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부모 말을 너무 잘 듣기만 한다면 그게 오히려 더 문제라고 했다. 그리고 학생에게 공부가 가장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공부에만 목매달지 말라고 했다. 부모가 병으로,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진정으로 그 슬픔을 오래 담고 있는 고등학생들이 요즘 잘 없다. 부모의 죽음을 해방으로 느끼는 경우도 있어 보인다.

 오늘 이렇게 와서 네가 친구들과 연주하는 것 감동으로 들었다고 하면서 마음을 열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아들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한 10여 분 했던 것 같다.
 우리 만남을 복된 만남으로, 우리 삶을 축제로 만들자면 가슴을 열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축제의 달 오월이다.

시인 / 문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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