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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산 자와 죽은 자의 절규!
사회

산 자와 죽은 자의 절규!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7/06/26 00:00 수정 2007.06.26 00:00
6.25전쟁 최초의 민간인 학살 - 보도연맹 사건

1949년 6월 5일 결성된 국민보도연맹(이하 보도연맹)은 민간인 학살에 대한 전주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 정부는 당시 정치적 상황과 정권 유지를 위해 좌익적인 색체(일명 빨갱이)나 똑똑한 사람을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하지만 전쟁과 동시에 이 조직은 이승만 정부의 군인과 경찰에 의해 집단 학살을 당했다.(사진은 양산지역 보도연맹 학살장소로 증언되고 있는 동면 사배골짜기 전경)

양산지역은 일명 보도연맹 사건으로 약 350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1960년 4.19직후 유족들이 유골을 발굴했을 때 무려 712구나 되는 유골이 발견됐다. 이는 부산, 김해 등 인근 지역에서 끌려온 맹원들이 이곳에서 함께 학살당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학살의 전주곡, 보도연맹 가입

증언에 따르면 학살이 이뤄진 때는 1950년 7월 7일이고, 장소는 사배골짜기였다. 당시 보도연맹원들은 학살을 당하기 전 목화창고(현재 중앙동 사무소 근처)에 끌려가 며칠을 갇혀 있었다고 한다.

김진우(67. 범어리)씨는 "당시 9살이었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가 어느 날 경찰들에게 끌려가 목화창고에 갇혔다. 아무런 잘못이 없기 때문에 곧 풀려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버지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양산지역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 가운데 보도연맹이 무슨 단체인지도 모르고 가입한 사람이 태반이었다.

오만준(79. 가촌리)씨는 "아버지가 시장에 갔다가 도장을 찍으라기에 도장을 찍었다. 그게 보도연맹인지도 몰랐다. 시골에서 농사만 짓고 살던 까막눈들이 뭘 알았겠나"라며 "그냥 동네에서 좀 똑똑하다 싶은 사람에게 면서기가 나와 집집마다 돌며 가입하라고 도장 받으러 다녔다"고 말했다. 

유가족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당시 보도연맹원 수를 채우기 위한 일종의 할당제가 있었으며, 모두들 별 탈 없을 거라는 생각에 도장을 찍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굳이 도장을 찍지 않았는데도 보도연맹원으로 분류돼 관리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씻을 수 없는 상처, 감금과 학살1950년 6월 중순께부터 각 마을로 무장한 경찰들이 들이닥쳐 닥치는 대로 보도연맹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보도연맹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목화창고로 끌려가 갇혔다. 당시 주민들은 곧 풀려 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그것이 아니었다.

김진우 씨는 "아예 처음부터 사람을 반 죽여서 데리고 갔다. 얼굴도 제대로 못 들고 트럭에 실려 목화창고로 끌고 갔다. 가두고 나서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어머니나 친척들이 아버지가 먹을 음식을 싸가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당시 갇힌 사람들은 굶주림과 공포에 떨었다. '만약 도망가면 가족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협박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 며칠 뒤 목화창고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새벽에 어디론가 끌려가 모두 총살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가 1950년 7월 7일 새벽 3시다.

김경호(80. 범어리) 씨는 "총살을 하기 전에 미리 구덩이를 파 놨다고 했다. 모두 죽이고 난 뒤에 흙으로 대충 덮고 난 뒤에 군인들이 떠났다"고 말했다. 김 씨는 당시 남편과 시아주버니, 시동생을 잃었다. 한 집안에 남자 세 명이나 동시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당시 24살이던 김씨는 증언을 하며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난 듯 눈시울을 붉혔다.

양산, 진상규명 40건 접수

지난해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 따라 양산시가 접수한 과거사 진실규명에 접수된 52건 가운데 보도연맹 사건에 관한 내용이 40건을 차지했다. 때문에 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하지만 정확한 진실규명을 위한 움직임은 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유족들은 4.19혁명 이후 보도연맹 유족회가 결성되고 춘추공원에 위령비를 건립해 위령제를 지내왔지만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를 불법으로 간주해 철거했다고 말했다. 

김진우 씨는 "보도연맹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움직임이 아쉽다. 지금 살아 있는 당시 목격자들이 죽으면 진실도 함께 묻힐 것이다"며 "금전적인 보상 따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보도연맹(保導聯盟)이란?
 

 정식명칭은 '국민보도연맹'이며, 1949년 좌익 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한 반공단체다. 애초 이 단체의 목적은 국가보안법에 저촉되거나 전향한 자로 분류된 인사들을 빠짐없이 가입하도록 규정해, 그들에 대한 회유와 통제를 쉽게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보도연맹은 1949에서 1950년 사이 당시 좌익세력을 와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와 경찰은 초기 후퇴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함으로써 민간인 집단학살을 일으켰고, 이는 북한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일어난 좌익세력에 의한 보복학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전쟁 와중에 조직은 없어졌지만, 지금까지도 정확한 해명 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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