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가마에서 새 생명을 얻어 세상으로 나오는 도자기를 바라보는 선생은 여전히 기대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이었습니다. 분청백자항아리의 은은한 피부를 만질 때 빛을 발하던 눈동자와 미소 그리고 동유항아리가 깨어질 때의 아쉬움이 교차하던 시간이었습니다. 일흔 일곱의 노련한 사기장 신정희 선생입니다. 그것이 1949년 청자 사금파리 한 조각과 만남 이후 60여년의 세월을 오직 사기장 한길만을 걸어 온 신정희 선생이 이 세상에서 받아낸 마지막 생명들이었습니다.양산 통도사의 지산마을, 여기는 신정희 선생이 1975년 가마를 열고 도예의 꽃을 활짝 피우고 열매를 맺은 곳입니다. 이곳에서 2007년 6월 18일 밤 대한민국 도예의 큰 별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신정희 선생은 1930년 8월 29일 사천만의 한 어촌마을에서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열아홉 살 되던 해, 당시 삼천포중학교의 시조시인 김상옥 선생의 “이 청자 사금파리 한 조각에 우리 민족의 혼이 담겨있다”는 말을 귀동냥한 것이 선생의 일생을 사기장으로 운명지운 첫 단추였습니다. 1951년 징집되어 한국전쟁을 겪고 1959년 제대하면서 도자기와의 인연이 깊어지기 시작합니다. 『고려다완』이라는 일본책을 보고 ‘왜 기좌이몽 같은 사발이 일본에 가 있는가, 왜 거기에서 도자기 국보 1호가 되어있는가 그리고 왜 우리는 그것에 관심이 없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선생에게는 이것이 곧 장인(匠人)으로서의 첫 개안(開眼)이었습니다. 도자기 제작기술이라거나 불때기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었건만 무슨 숙명처럼 다가 온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누구도 돌아보지 않아 잡초와 가시로 뒤엉킨 길이었습니다. 전국의 옛 가마터를 찾고 각 지역의 도자기에 대한 공부로 시작된 열병은 선생을 마치 그릇귀신이 들린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고, 실패와 실패로 이어지는 길은 오히려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신장결석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 도무지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옛 도자기 재현, 그로부터 가해지는 재정적 고통은 선생을 극도의 절망으로 몰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강렬히 타오르는 정신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도자기의 길로 들어선 지 10여년 1969년 여름, 끊어졌던 조선사발(황도사발 혹은 일본의 이도 다완)의 역사는 다시 맥박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인들을 열광케 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국내의 도자기에 대한 인식에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이어온 사기장의 길은 한민족의 심성을 닮은 옛 도자기들이 다시 태어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들들과 많은 제자들에 의해 그 맥이 요동치고 있습니다.선생은 2007년 6월 22일 통도사 다비장에서 육신을 불에 맡겨 우직과 불굴의 사기장으로서 살아왔던 일생을 한 알의 사리로 남겨 놓고 떠났습니다. 불의 사기장답게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간 사람을 선각자라 합니다. 천상 한국 도예계의 선각자였던 선생의 가시는 길에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