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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한 평생 흙과 함께 하다 흙으로 돌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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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한 평생 흙과 함께 하다 흙으로 돌아간
우리 시대의 사기장 신정희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7/06/26 00:00 수정 2007.06.26 00:00

“흙은 생명의 원천이다. 목숨이 있는 것은 모두 흙을 의지한다. 그 흙을 다루는 것은 장인의 손이다. 흙을 그냥 두면 흙이지만, 흙에 감성을 불어 넣으면 보석이 된다”
사기장 신정희 선생 자서전 『흙과 불 그리고 혼』 중에서

생명의 원천인 흙에 혼을 불어 넣으며 평생을 흙과 함께 살았던 도예계의 거장(巨匠), 사기장 신정희 선생이 지난 18일 흙으로 돌아갔다. 오로지 우리 사발을 되살리겠다는 끈질긴 집념으로 조선 초기 만들어졌던 황도사발을 재현해 우리 민족의 혼을 일깨웠던 신정희 선생의 불꽃 같았던 삶을 들여다 보자.

“아버지는 집에 거의 오시질 않았다. 얼굴을 잊을 만하면 집에 오시곤 했다. 오실 때는 항상 헤진 가방을 어깨에 메고 오셨다. 큰 가방 속에 눈깔사탕 한 개쯤은 있을 법도 한데 나오는 것은 깨진 도자기 파편인 사금파리들이 전부였다. 철없는 나는 맛있는 과자도 아닌 돌멩이 같은 사금파리만 가득 가져오시는 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아빠, 내 선물은?’이라고 물으면 아버지는 다정한 미소로 ‘이 사금파리가 네 선물이란다’ 하시며 달래곤 했다”

임진왜란 이후 명맥이 끊어졌던 조선사발을 재현한 사기장, 고(故) 신정희(申正熙. 향년 77세) 선생의 뒤를 이어 사기장의 길로 들어선 신한균(48. 큰아들)씨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이렇게 말했다. 단순히 깨진 도자기 조각에 불과한 ‘사금파리’는 우리나라 도예계 거장(巨匠)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사금파리로 시작한 도예의 길
시간을 거슬러 1949년. 당시 19살이었던 청년 신정희는 어려운 형편에 집안일을 돕고자 평소처럼 지게를 메고 집을 나섰다가 우연히 삼천포중학교 국어교사였던 시조시인 김상옥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청년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위대함이 바로 이 속에 있다”는 말과 함께 청자 사금파리 하나를 얻었다.

사금파리를 손에 쥔 청년은 그대로 사금파리에 혼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날 이후 청년의 인생이 바뀌었다. 청년은 나무를 하러 가거나 심부름을 갈 때에도 괜히 땅을 뒤적거리기도 하고 산을 헤매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가마니가 넘는 사금파리가 모였다.

생전에 신정희 선생은 “코 흘릴 때 구만리 옛 가마터에서 구웠다는 깨어진 사금파리 하나, 이것이 골동품과의 인연을 맺어주었고, 이 골동이 나를 도자기의 세계에 몰입시켰다. 누구도 우리 옛 도자기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다행히도 옛 지방 가마의 사금파리는 어디에도 가득 쌓여 있었다”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 선생이 20살이 된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 자연스레 전쟁터로 불려갔다. 같은 민족끼리 죽이고 또 죽이는 민족 상쟁. 하지만 그 속에서도 도자기에 대한 청년의 집념은 계속됐다. 청년의 군장에는 사금파리가 가득했고, 군장 검사 때 이것이 발각돼 ‘너는 사금파리를 가지고 전쟁을 하느냐?’라며 몽둥이로 맞은 적도 있다고 한다.

8년간 군대생활을 마친 그는 전쟁이 끝나고 결혼했다. 가정을 이루고 딸린 식구들이 생겼지만 선생은 오로지 사금파리에만 빠져 있었다. 가정은 내버려둔 채 사금파리를 찾아 전국을 헤맸다. 아내가 젓갈 행상을 하며 가정을 꾸려갔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눈앞이 캄캄하고 ‘내 탓이다’라는 자책감에 빠졌지만 사금파리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런 그를 두고 주위에 ‘그릇 귀신이 들었다’라며 혀를 찼다. 그릇 귀신을 쫓으려고 굿도 세 번이나 했다.  

신정희 선생은 “정말 나는 그릇 귀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릇 귀신이 들면 들수록 옛 그릇을 보는 눈과 진품을 감정하는 능력은 나날이 발전했다. 지천으로 널려 있던 사금파리를 그렇게 많이 보고 만질 수 있었던 걸 보면 그릇 귀신이 참으로 착한 귀신이었나 보다”라고 말했다. 

우리 사발을 향한 식지않는 열정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부산의 골동품 가게에서 우연히 한 일본인을 만난다. 그 일본인은 그에게 ‘고려다완’이라는 책을 건네며 “왜 지금의 조선에는 이런 사발을 만드는 사람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책을 펼치는 순간 선생은 처음 사금파리를 손에 쥐었을 때보다 더한 열병에 빠졌다. 책에는 그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옛 가마터에서 본, 바로 그 사금파리와 같은 종류의 사발이 있었다.

그때부터 선생은 봇짐 하나 달랑 메고 신들린 사람처럼 떠났다. 그러다 무작정 찾아간 곳이 경북 청송. 그곳에서 나이 많은 사기장에게 사금파리를 내밀고 제조법에 대해 물었다. 그때부터 비로소 그는 도자기 제조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제는 도자기를 만들 장소가 필요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우리나라의 오지 중의 오지로 불리는 충북 단양의 방곡이었다. 그곳에는 도자기흙인 태토가 무진장 널려 있었고, 묵보래라는 유약 재료도 곳곳에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도자기 만드는 기능을 익혀갔다.

노력의 결실. 조선 사발 재현
조선 사발을 재현하려고 했지만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만들면 깨버리고 또 깨버리고…. 수없는 반복 속에 비록 조선 사발을 재현하지는 못했지만 뭔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고서 방곡을 떠났다.

방곡에는 백자를 만들 재료는 많지만 조선 사발에 맞는 재료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레 차는 대장도 필요했다. 그러다가 경북 문경으로 갔다. 그곳에는 ‘천완봉’이라는 물레 대장이 있었고, ‘서선길’이라는 도자기 기술자가 있었으며, ‘서민홍’이라는 친구도 있었다. 그들에게 조선 사발을 재현하는데 동참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들은 뜻을 따라줬다.

계속해서 유약을 입히고 불을 때고 하기를 수백, 수천 번. 그가 깬 사발들이 사금파리가 돼 산을 이룰 만큼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이 도왔는지 조선 사발다운 사발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작품을 들고 서울 인사동 골동품가게로 향했다. 당시 전문 감정사들은 옛 조선 사발과 선생이 재현한 조선 사발을 구분하지 못하고 ‘진품’이라는 판정을 내리기도 했다. 마침내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조선 사발의 완벽한 재현이 이뤄진 것이다. 그때가 1968년 말 무렵이다.

이 사실은 일본에서 먼저 알려지기 시작했다. 선생의 조선 사발 재현 현장이 TV와 신문에 소개됐고, 일본 언론은 “일본의 국보 ‘이도 다완’이 재현됐다”며 흥분했다. 이 사실이 뒤늦게 국내에 알려지면서 언론이 그를 집중 조명하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앞다퉈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선생은 무심코 ‘막사발’이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언론들은 ‘막사발 재현’, ‘500년 만에 살아난 막사발’이라고 일제히 보도했다.  

신정희 선생은 “지금 생각하면 가장 큰 실수였다. 우리 사기장들이 오묘한 솜씨로 빚은 사발을 ‘막사발’이라고 하다니. 남들이 부르는 대로 생각 없이 ‘막사발’이라고 한 것은 내 가장 큰 실수다”라고 말했다. 선생은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 사발 가운데 일본인들이 가장 숭상하는 ‘이도 다완’이 정말 막사발인 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1975년. 선생은 하북면 지산리 574번지, 통도사에 있는 영축산 자락으로 가마를 이요했다. 이후 1979년 6월 15일부터 22일까지 서울 롯데호텔 전시장에서 그의 국내 첫 전시회가 열렸다. 한국방송공사가 주최한 이 전시회는 ‘해외동포 모국방문돕기 기념 성금모금’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지만 임진왜란 이후 명맥이 끊어진 것으로 생각됐던 조선 사발이 한 장인의 집념을 통해 재현됐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신정희 선생이 재현한 조선 사발은 일본에서 먼저 각광받았지만 이제 국내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일본인들은 비파형 분청사발을 가리켜 ‘환상의 그릇’이라고 칭하고 있고, 국내에서는 노란색 사발을 일러 ‘전승도예의 개가’라고 평가하고 있다.

1970년대 당시 정계 거물이었던 김종필 씨가 일본에 선생의 작품을 선물로 가져가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도예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됐다. 이때부터 선생의 작품은 국빈이나 각국 외교사절의 선물로 요긴하게 쓰이게 됐다. 전 로마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르 2세에게 선생의 작품이 전해지기도 했다.

흙으로 돌아간 도예계 거장
2007년 6월 18일. 우리나라 도예계의 큰 별이 졌다. 향년 77세. 장맛비가 부슬부슬 내렸던 22일 통도사는 선생과의 각별한 인연으로 다비식을 치렀다. 평생을 혼을 불어 넣은 흙을 불에 구우며 살아온 선생이 불과 함께 흙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 자리에는 선생의 가족들과 제자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참석해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눈물을 흘렸다.

“도자기는 내게 있어 종교이자 신앙이다. 그릇을 빚을 때 한갓 형태에 집착하지 마라. 도자기는 손으로 빚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만드는 것이다. 흙에서 꼬신내를 맡지 못한다면 지금이라도 사기장을 그만두는 것이 현명하다”라고 제자들을 꾸짖던 선생의 정신은 앞으로도 꺼지지 않은 불꽃으로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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