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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있는공간] 대가들이 주는 깨달음의 즐거움..
사회

[음악이있는공간] 대가들이 주는 깨달음의 즐거움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7/07/24 00:00 수정 2007.07.24 00:00

좋은 음악을 들으면 누구나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과연 음악에는 어떤 본질적인 힘이 있기에 인간에게 행복감을 줄 수 있을까?

공자의 애제자 안연이 공자에게 인(仁)을 여쭈었다. 공자의 말씀하시되, “극기복례(克己復禮). 곧 내가 실체라는 생각을 넘어 관계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것이 인이다” 이 말은 내가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20세기 구도자 라즈니쉬의 가르침을 들어보자. ‘깨어있음’ 즉 ‘깨달음’은 그대 자신을 변형시킨다. 그대 자신이 변형될 때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전 세계가 따라서 변형된다. 문제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그대 자신을 만들어 내는 데 있다. 그대는 바로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다. 그러므로 그대가 변형될 때 이 세계가 변형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위의 두 얘기는 겉으로 보아선 음악과 무관해 보이는 내용이다. 하지만 진정한 음악 행위가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상통하는 면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곡가가 만든 작품만을 음악의 실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어떤 작품이 연주가의 연주행위를 통하여 음들이 살아났을 때 비로소 음악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부족하다. 혼자서 연주하는 음악가를 한 번 상상해 보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에게는 술 취한 어떤 사람이 가라오케(일본말로 가짜 오케스트라)에서 혼자 목청껏 부르는 노래와 다름 아닌 것이다. 좋은 작품과 훌륭한 연주, 이것을 판단하는 것, 그리고 느끼고 감동하는 것은 바로 청중이다. 따라서 청중을 무시한 작품이나 연주는 있을 수가 없다고 본다. 결국 “음악은 작곡자의 작품과 연주가의 연주, 그것을 감상하는 청중과의 관계를 통하여 성립한다”는 것이다.

가끔씩 우리는 득음의 경지에 오른 음악의 대가들을 만난다. 그들은 음악을 통하여 나와 관계를 맺는다. 그리하여 서로의 존재감을 감동으로 느낀다. 그 감동의 기쁨은 무엇과 비교되지 않는다. 음악행위라는 관계를 통하여 아름다움에 대한 작은 깨달음을 느끼는 순간 우리 자신은 변형된다.

우리는 기쁨이 충만한 모습으로 변형된 세상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바로 연주회가 끝나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속에서이다. 그들을 유심히 본 적이 있는가? 멋진 작품이 고도로 훈련되고 집중된 상태에서 청중과의 깊은 교감을 이루었을 때, 청중이 갖는 아름답게 변형된 얼굴들인 것이다. 바로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깨달음의 즐거운 표정이 아니겠는가!

어린이들에게 편식은 아주 몸에 나쁜 것이라면서 골고루 영양을 섭취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그러나 정작 개개인의 정신세계와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음악’을 취함에 편식하는 것은 아닌지? 물론 본인의 기호에 따라 좋아하는 것만을 선택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세상은 넓다. 다양성이 요구되는 현실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음악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다양한 깨달음의 즐거움이 많아진다면 삶은 더욱 풍요롭게 변형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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