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일 오후 서울올림픽체조경기장에 들어선 박근혜 후보는 잠시 자리에 앉기 전에 무엇을 생각했을까. 28년 전 서거한 아버지의 얼굴을 떠 올렸을지도 모른다. 선대본부장으로부터 당선이 확정적이라는 보고를 받고 단상으로 나설 때만 해도 아버지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청와대에 다시 들어갈 수 있음을 생각하며 감격하기도 했으리라.하지만 그것도 잠시, 공식 개표가 진행되면서 여론조사의 변환 수치로 역전되었다는 보고를 받게 되는 박근혜. 그녀는 잠시 동요하는 듯 했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고 오히려 참모를 격려한다. 잠시후 이명박 후보의 당선 발표에 이은 연설에서 박근혜는 침착한 목소리로 패배를 인정하고 대선 승리를 위한 당원들의 결속을 주장한다.수많은 언론에서 박근혜의 진정한 승리를 찬양하고 나섰다. 우리나라의 정치사에 찾아볼 수 없는 미덕을 보여 주었다고. 특히 여성으로서, 그동안 경선 과정에서 북핵 등의 국제정치 이슈 속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바라는 국민들의 여론에 다소 불리한 지지를 감수해야 했던 그로서는 비록 득표에서는 뒤졌지만 오랫동안 잊지 못할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것만은 틀림이 없다.32년 전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시민회관에서 발생한 영부인 육영수여사 피습사건이 떠오른다. 당시 약관의 나이이던 필자는 북한으로부터 조종된 문세광이 대통령이 연설중이던 단상을 향해 쏘아댄 총알에 영부인이 맞아 숨진 사건을 후에 TV에서 보면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보여준 의연한 자세에 큰 충격을 받았다. 박대통령은 경호원들의 제지로 잠시 연단 아래에 몸을 낮췄다가 범인이 제압되고 영부인이 후송된 이후 즉시 일어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남은 연설을 끝내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담대한 남성을 보는 것 같아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박근혜 후보가 보여준 의연함과 냉철함은 국가 지도자로서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덕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이합집산과 철새 정치인이 난무하는 작금의 정치 현실에서 내부 경쟁에서 패자가 보여줘야 할 자세를 웅변으로 드러낸 것 같아 여타 정치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실로 크다 할 것이다. 작게는 지방정치에서 크게는 중앙정치에 이르기까지 고금을 막론하고 경쟁과 협력이라는 질서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의 속성은 대부분 자체 경쟁 이후 분열과 대립이라는 극한의 구도를 보여 왔다. 물론 그것은 어느 정도 경선과정의 합리성과 투명성이 담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지만 결과에 승복하는 문화가 정착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몇 년 전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논란 끝에 유권자 투표에서는 이기고도 결과에서는 부시에게 패배했던 고어 전 부통령은 그를 따르는 많은 참모진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이고 단호한 패배 선언으로 전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일부 주에서의 개표에 대해 문제 제기와 법적 투쟁을 계속할 수도 있었지만 고어는 장기간의 검표 쟁의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신속한 국법질서의 확립을 위해 자신이 뒤로 물러났다. 고어는 그 뒤 정계를 은퇴하고 지구 환경문제에 적극 참여하여 전세계를 돌며 강연과 환경보호활동을 펴므로써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진정한 승자는 정의에 순종하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지역 정가에서도 이번 경선과정에서의 갈등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현역 국회의원이 주축이 되어 이명박 후보 손을 들어 준 반면 일부 시, 도의원과 당원들은 박근혜 후보 편에 서서 득표활동을 펴 왔는데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음해와 비방이 녹녹치 않았다고 들린다. 소식통에 의하면 김양수 의원이 전당대회가 끝난 직후 박 후보측에서 활동한 박규식 도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화합과 단결을 요청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서로간에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우리는 지난 해 지방선거에서 시민사회가 둘로 나뉘어 심하게 대립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비록 일개 정당 내부 사정이긴 하지만 지역의 정서상 대다수의 시민들과 연관이 있는 한나라당이 내부 경선 과정에서의 이해관계에 따른 반목이 오래가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야만 박근혜의 깨끗한 승복이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