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잘못 살아온 것도 아니고 다른 이에게 원한을 산 일도 없다. 자신이 원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오직 일에만 매달려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온 광고회사의 중견간부 사에키, 인생의 절정기 나이 50살을 앞둔 그에게 알츠하이머병이 찾아왔다. 자신의 의지대로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제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가족(아내)의 짐이 되어버렸다. 흐르는 시간 만큼 사라져가는 소중한 기억을 붙잡으려 발버둥쳐 보지만, 불행은 그와 아내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고 병원 계단에 주저 앉아 아내를 부둥켜안고 우는 사에키, 아내와 다투다 문득 아내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접시를 보고 바닥에 쓰러져 통곡하는 사에키와 당신이 아닌 당신의 병이 한 일이라고 감싸며 함께 우는 아내 에미코, 도예촌 산길을 내려오다 아내를 몰라보고 지나치는 사에키….가족이 가족일 수가 있고, 부부가 부부일 수가 있다는 것은 함께 했던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의 기억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기 때문에 존재했던 주위의 모든 것들이 기억의 상실과 함께 그 존재가 사라져 갈 때의 고통, 아니 그 고통마저도 기억과 함께 사라져 간다.겉모습은 그대로인 채 기억만 서서히 빠져나가 사랑하는 아내도 알아보지 못하게 변해가는 사에키지만, 한가지 소중한 기억-연애 시절의 아내의 모습- 만큼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처녀적 아내의 환영에 이끌려 젊은 날 함께 공부하던 도예촌에 가지만 다음날 그를 찾아온 현재의 아내는 알아보지 못한다.특별한 소재도 아니고 반전도 없이 다소 지루한 듯 전개되는 이 영화에 몰입하게 되는 것은 역시 주연 사에키역의 와타나베 켄과 아내 에미코역의 히구치 가나코의 깊이 있는 연기이다.라스트 사무라이’, ‘게이샤의 추억’ 등 헐리우드산 영화에서의 선 굵고 카리스마 있는 연기와는 달리 이 영화에서 와타나베 켄은 전형적인 일본의 직장인 역할과 병으로 무너져 내리면서도 자존을 잃지않는 중년 남자의 역할을 실감나게 했다.아내 역의 히구치 가나코는 처음 본 배우인데 곱게 나이를 먹어 기품있게 감정조절을 하는 아내의 역을 잘 보여주었다.시대의 요구에 떠밀려 치열한 삶을 살아왔지만 또한 시대의 요구에 떠밀려(꼭 알츠하이머병이 아니더라도) 어느새 짐이 되어 퇴장을 강요 당하는 이 시대의 아버지와 남편들을 생각해본다. 이 영화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대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