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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경기도 수락산 자락에 있던 내원암에는 친일파 후복들이 경내 부지가 자신들의 땅이라며 법원에 소송을 내는 사건이 있었다. 이른 바 ‘내원암 사건’에 내원암을 말사로 두고 있던 봉선사 스님들은 분노했다. 친일파들이 부당하게 취득한 토지를 그 후손들이 권리를 주장하고 나선 어이없는 현실에 봉선사 스님들은 ‘친일파의 재산권 보호는 위헌’이라는 취지의 위헌법률심판으로 맞서 세간의 주목을 끌게 됐다. 이 같은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친일파의 후손들은 소취하서를 법원에 제출하고 봉선사에 소취하 동의를 구하며 부랴부랴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봉선사 스님들은 “지금은 관음보살의 부드러운 자비보다 선사 스님의 엄중한 죽비 경책이 필요한 때”라며 원칙을 고수해 결국 사회 각계각층이 친일파 후손의 땅찾기에 대한 문제점을 알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러한 원칙은 ‘친일파 재산환수 특별법’을 통과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 재산 찾기 저지 운동에 앞장서온 봉선사 혜문스님은 좀 더 의미있는 운동으로 친일파 재산 찾기 저지 운동이 한 단계 승화하길 희망했다. 조선왕조실록 환수위 태동
잃어버린 민족정신 되찾기2004년 대한불교 조계종 25교구 본사 봉선사에서 성보문화재 조사를 담당하고 있던 혜문스님은 조사 과정에서 1953년까지 봉선사에 소장되었던 ‘곤여만국전도’를 일본이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일본 유학길에 오른 스님은 한국사 관련 서적을 열람하며 ‘곤여만국전도’의 행방을 찾던 중 쓰에마쓰라는 일본인이 쓴 ‘이조실록고략청’이라는 책을 만나며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이 일본 도쿄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친일파 재산 찾기 저지 운동이 마무리되면서 스님이 함께 한 사람들에게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 환수운동을 제안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2004년부터 끈기있게 자료를 준비하며 조선왕조실록이 일본에 의해 약탈된 문화재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온 혜문스님은 2006년 일본 도쿄대로부터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면으로 확인하게 된다. 이후 2006년 3월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이하 환수위) 출범 기자회견과 함께 일본의 지성으로 불리는 도쿄대와 4개월간의 싸움을 벌이게 된다. 우선 환수위 구성 전에 준비위에서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조선왕조실록이 일본에 의해 약탈당했다는 객관적인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입증하는 일이었다.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유린한 뒤 보관상태가 가장 양호했던 오대산본을 데라우찌 총독과 도쿄대 교수 시로토리가 강탈했다는 각종 문서자료와 현황을 입수한 환수위는 도쿄대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게 된다. 하지만 소송 주체가 문제였다. 우리 정부는 지난 1965년 한일협정 당시 1천432점의 문화재를 반환받으면서 문화재 반환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한 상태였고, 더 이상의 반환 요구를 일본 정부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민간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해야 했는데 약탈 당시까지 오대산본을 소장하고 있던 월정사를 소송 주체로 내세우는데 이르렀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가 설치된 이후 ‘실록수호총섭’의 지위를 가지고 월정사에서 오대산본을 관리·보관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소송을 맡을 변호사를 구하는 일은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누구도 도쿄대를 상대로 소송에서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환수위는 소송을 담당할 변호사를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일본에 인권변호사로 활약하고 있던 김순식, 이춘희 변호사를 선임하고 2006년 3월 마침내 환수위 구성을 완료하고 일본 대사관에 반환요구서를 보내게 된다. 정정당당하게 최선을 다하라
도쿄대, 서울대 기증으로 가닥소송까지 준비하며 진행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 환수운동은 결과적으로 ‘서울대 기증’이라는 우회적인 결론을 맺고 말았다. ‘반환’이 아닌 ‘기증’이라는 형식으로 도쿄대는 환수위의 의지를 빗겨간 셈이다. 하지만 도쿄대와의 협상과정에서 일본과 우리 측이 보여준 입장은 일본의 약탈문화재에 대한 속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양산의 유물환수운동 추진에서 참고할 만한 사항이다. 2006년 3월 도쿄대와 첫 협상 테이블에 앉은 환수위측 대표단의 입장은 간단한 것이었다. ‘문화재는 제 자리에 있을 때 가장 빛이 난다’는 소박한 진실이었다. 소박한 진실이었지만 환수위가 구체적인 약탈 경위를 입증해 가며 도쿄대를 압박해 가자 진실은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도쿄대측은 실무자로 반환 여부와 대학의 견해를 전달할 입장이 아니라는 등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환수위는 이미 약탈 경위가 명백한 사안에 대해 뚜렷한 입장 표명이 없는 도쿄대를 상대로 일본 재판부에 직접 소송을 제기하겠다며 압박을 늦추지 않았다. 한편 국내에서는 ‘조선왕조실록 되찾기 국회의원 모임’이 결성되고, MBC ‘느낌표 - 위대한 유산 74434’에서 조선왕조실록 환수운동을 방송하는 등 국내 지지 여론이 형성되고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던 환수운동에 국민들이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3차 협상을 위해 환수위 대표단이 일본으로 떠나던 날 느닷없이 날아든 소식은 도쿄대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을 소장하고 있던 서울대에 기증 형식으로 반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환수위는 일단 조선왕조실록이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에는 환영의 뜻을 표했지만 도쿄대가 기증 형태로 오대산본을 돌려주는 것에 대해서는 일본의 수많은 약탈문화재를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항의했다. 당당한 걸음으로 시작한 환수운동이 끝까지 우리 것을 되찾는 당당한 일임을 알리는 항의였다. 조선왕실의궤 반환운동
계속되는 민족정신 살리기2006년 7월 7일 마침내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은 고국의 품에 안겼다. 조선왕조실록이 ‘불법약탈문화재’라는 사실을 입증하고도 도쿄대의 기증 제안에 쉽게 동의한 서울대의 처사는 아쉬움이 남지만 민간단체가 주도면밀하게 거대 대학을 상대로 남긴 성과기에 기쁨은 말할 나위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이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이후 환수위는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하고 있다. 바로 ‘조선왕실의궤 환수위’로 옷을 갈아 입은 것이다. 민족정신을 살리는 친일파 재산 찾기 저지 운동에서 시작한 환수 운동은 형식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지만 제2, 제3의 조선왕조실록 환수를 이루기 위해 다시 첫 걸음을 내딛고 있다. --------------------------------------------------------[인터뷰]조선왕조실록 환수 이끈 혜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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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조선왕조실록 환수는 첫 민간주도의 반환운동
냉정하고 학술적인 조사 선행, 긴 호흡의 운동“양산 부부총의 문화재 환수운동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 환수운동의 실무 간사이자 오대산본 일본 소장 사실을 알린 봉선사 혜문스님은 지난 2005년과 2006년 언론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았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혜문스님은 자신이 속한 봉선사의 말사인 내원암 경내 부지를 친일파 후손들이 자신의 땅이라며 소송을 제기한 사건에 맞서 ‘친일파 재산 환수특별법’을 통과시키는데 힘을 모았다. 그 이후 조선왕조실록 환수운동을 성공시켰고, 지금은 조선왕실의궤 환수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스님은 우리 나라의 약탈문화재, 특히 일본으로 간 유물에 대해서 “‘한일협정의 벽을 넘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고 강조한다. 스님은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한국 정부는 문화재 반환과 관련한 청구권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라며 “다만 한일간의 우호관계를 고려해 개별적 사례로 대응한다”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했다.하지만 국민들의 의지가 뒷받침된다면 북관대첩비나 조선왕조실록에서 보여주듯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강조했다. 스님은 우선 문화재의 반출 경위, 약탈되기 전의 소장처, 현재 보관주체와 품목, 실현가능한 반환 방식의 고민 등 주도면밀한 준비단계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2004년 일본 쿄토에 있을 때 도쿄대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약탈 경위와 현재 보관상황 등을 입증하는 약 1년간의 걸친 조사가 필요했다”며 “조사 이후에도 도움이 필요한 월정사를 몇 차례 찾아 도움을 요청하고 승낙을 얻어낸 바 있다”고 전했다. 긴 호흡으로 열정적인 환수운동을 펼친다면 불가능하진 않다는 것이 스님의 설명이다. 하지만 많은 지자체에서 자생적으로 유물환수운동이 펼쳐지곤 하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지나친 언론 의지’를 들었다. “문화재 환수운동은 상대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들끼리만 흥분해서 성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전제한 뒤 “냉정하고 학술적인 조사가 선행되고 운동을 주도하는 측에서 법률적, 역사적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전개해야 하는데 지금 대부분의 운동이 면밀한 공부를 바탕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단발성 홍보에만 급급한 경향이 있다”고 꼬집었다. 또한 스님은 운동의 조직 구성에 대해서도 언론에 지나치게 신경쓰지 말고 운동의 지도부를 구성한 뒤 운동의 지도부가 참여한 각 단체의 이견을 조율하며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도록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한다. ‘진실은 상상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한다’는 신념을 가진 스님은 지금 추진 중인 조선왕실의궤 환수운동 외에도 독특한 직함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일본 승려인 오타니가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국보급 문화재를 약탈한 이른 바 ‘오타니 컬렉션’ 환수운동을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오타니 컬렉션’은 우리 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약탈문화재로 스님이 말한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을 때 가장 빛난다’는 명제를 몸소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모순되게도 문화재청 등 정부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문화재를 제대로 보관할 수 있는 시설이나 정치 상황이 아니라는 점을 들여 반환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일본이 과거 우리 문화재를 약탈하면서 내세웠던 논리와 다를 바 없는 셈이다. 결국 우리만의 흥분과 우리만의 민족의식으로 문화재 반환운동을 전개할 것이 아니라 인류의 평화와 공존이라는 더 큰 틀로 ‘약탈문화재 반환’에 대한 인식을 달리 할 때 우리가 추진하고자 하는 유물환수운동이 더 많은 세계인들의 공감을 불러 올 수 있다는 ‘진실’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스님은 “양산시민들이 진실의 힘을 믿고 긴 호흡으로 운동을 진행한다면 그 힘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이제 첫 걸음을 내딛는 양산 유물환수운동의 성공을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