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기고]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 선양사업 서둘러야..
사회

[기고]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 선양사업 서둘러야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8/01/29 00:00 수정 2008.01.29 00:00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우해 헌신한 사람 중에는 양산 출신도 여럿 있다. 이중 가장 두각을 보였던 인물은 임시정부에서 재무차관을 지냈던 상북면 소토리 출생의 우산(右山) 윤현진(尹顯振, 1892.9.16~1921.9.17) 선생이다.

윤 선생은 구국의 일념으로 건강도 돌보지 않고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불과 30세의 젊은 나이에 일생을 마감할 만큼 항일 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알려진 바로는 선생은 일본 메이치대학 법학과 재학 시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고 김성수, 신익희, 송진우, 장덕수 등과 함께 공복결사동맹을 하면서 항일투쟁을 시작했다. 독립운동 자금 모금을 위해 백산상회에 가입하고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활동에 나섰으며 고향 양산에 의춘 학원을 설립해 후진 양성에 매진하기도 했다.

3·1만세 운동 때는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했고 일본상품 배척을 위한 위춘상행을 설립하기도 했으나 일제 탄압이 강화되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초대 재무차장을 역임하면서 임시정부의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사재를 헌납할 만큼 앞장섰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선생은 결국 병에 얻어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당시 일제 신문이 ‘형극(荊棘)의 배일(排日) 수완가 윤현진의 사(死)’라는 제목 하에 그의 사망은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 논평할 정도였다니 선생의 위치를 짐작할 만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으며 상하이 정안사 외인묘지에 있던 유해는 1995년 6월 23일 대전국립묘지에 봉환 안장됐다. 필자는 지난해 6월 양산문화원 주관으로 지역 청소년 50여명과 함께 대전국립 현충원 내 애국지사 묘역에 마련된 선생 묘지를 참배하고, 가져간 생가터 흙으로 고향산천에 대한 향수로 목말라 있을 선생의 넋을 달랬다. 

이렇듯 우리 양산의 큰 자랑임에도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는 제대로 된 사업이 하나도 없는 실정이 안타깝다. 지난 1959년 춘추원에 세워진 기념비만으로는 선생의 조국사랑을 기리고 널리 알리는데 부족하다.

이런 지지부진한 선양사업으로 인해 선생이 부산 출신 애국지사로 잘못 알려져 있다. 양산이 낳은 애국지사로서의 이름과 그 높은 뜻을 선양하기 위해서는 생가복원을 비롯해 그를 기리기 위한 다양한 사업들이 조속히 추진돼야 한다.

그러한 사업은 시민과 학생들에게 선생의 애국정신을 일깨울 수 있는 산교육장이 될 것이며 양산의 소중한 관광자원으로서의 역할도 함께 수행하게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