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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더불어사는큰나무 15] 상북 구소석 마을, 큰 나무들의 ..
사회

[더불어사는큰나무 15] 상북 구소석 마을, 큰 나무들의 땅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8/02/05 00:00 수정 2008.02.05 00:00

마을마다 사연을 가진 나무들이 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이 땅을 지켜온 큰 나무들. 지난해 지역신문발전기금 저술사업을 통해 양산 곳곳에 우리 삶을 지켜온 큰 나무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책으로 엮어보았습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온 큰 나무들의 새 의미를 2008년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할 양산시민들과 함께 다시금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지면을 통해 나누려고 합니다.

 

구소석 마을에는 재미있게도 당산나무가 세 그루나 된다. 물론 음력 삼월 삼짇날 지내는 마을 동제는 이제 마을 윗자락에 있는 할매당산 소나무에게만 지내지만 6.25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오랫동안 산 아래 있는 산지(山地)당산이라 부르는 소나무와 할매당산 소나무, 지금의 마을 회관 아래 있는 골목당산 포구나무 세 군데서 제를 지냈다.
특별취재팀

   
마을 어귀를 들어서면 한아름 되는 큰 나무들이 줄지어 손님을 반기는 마을.
상북 석계리 구소석 마을은 마을을 알리는 돌 표지석 뒤로 먼저 큰 나무들이 눈에 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연기념물 186호로 지정된 이팝나무가 봄이면 마을 전체를 환한 이팝꽃향으로 가득 채우던 곳.

하지만 마을의 자랑이었던 이팝나무는 90년대 들어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더니 결국 2000년 마을 길을 확장하면서 잘려 나가고 이제 흔적만 남아 있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백방으로 이팝나무를 살리기 위해 시에 탄원을 넣기도 했지만 헛수고였던 셈이다.

천연기념물이기 이전에 마을 사람들이 깊은 애정을 가지고 함께 살아왔던 이팝나무는 비록 자취를 감췄지만 구소석 마을은 큰 나무의 땅이라 부를 만큼 마을 길을 따라 200년이 넘는 30여 그루의 나무들이 오랜 세월을 지켜오고 있다.

 

길손이 발걸음을 멈추는 마을

 
▲ 상북면 석계리 구소석마을 2006/가을

구소석 마을은 신라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1700년대에 소석곡리(小石谷里)로 불리던 이름은 1800년대로 넘어와 잠시 남양리(南陽里)로 불리다가, 일제시대에 와서 소석(小石)으로 마을 이름이 정해졌다.

그 후 마을의 세가 커지면서 위천마을과 모래불마을로 분동되면서 오늘날의 구소석 마을이 된 것이다.

구소석 마을에 숲을 이루고 있는 큰 나무들은 포구나무, 느티나무 등으로 예부터 지나가던 길손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지녔다고 한다.

마을을 지키는 큰 나무들이 마을에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을 정도로 마을 주민들의 나무 사랑도 각별하다. 지금도 울창한 숲 속에 자리잡고 있는 구소석 마을은 나무를 훼손하거나 베어버리는 일은 엄격히 금지해왔다.

얼마 전만 해도 나무를 훼손하면 벌금을 물어야 했고, 요즘 와서도 이런 관습은 집 담을 새로 세우거나 길을 내기 위해 나뭇가지를 쳐야 할 일이 생기면 이장에게 보고를 하고 나서야 할 수 있다고 한다.

   
▲ 천연기념물 186호 석계리 이팝나무 흔적 2006/가을
주민들의 각별한 나무 사랑 덕분인지 구소석 마을에는 재미있게도 당산나무가 세 그루나 된다.

물론 음력 삼월 삼짇날 지내는 마을 동제는 이제 마을 윗자락에 있는 할매당산 소나무에게만 지내지만 6.25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오랫동안 산 아래 있는 산지(山地)당산이라 부르는 소나무와 할매당산 소나무, 지금의 마을 회관 아래 있는 골목당산 포구나무 세 군데서 제를 지냈다.

산지당산은 이제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깊은 수풀 속에 있지만 할매당산은 한 눈에 보기에도 우람한 몸통을 드러내며 마을을 굽이 보고 있다. 원래 수령이 400여년 되던 골목당산도 고사한 후 새로 심어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서 구소석 마을 주민들의 안녕을 지켜주고 있다.

할매당산 역시 6.25 전쟁 무렵 큰 눈이 내려 가지가 부러져 죽어 본당산 옆에 자라던 소나무가 새롭게 마을 당산나무로 지금까지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한다.

세 그루의 당산나무를 가진 구소석 마을 주민들은 원래 양산에서 물금, 동면 등은 양산천에 잠겨 있을 때가 많아 사람이 살만한 첫 마을이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동면 금산 이후로 사람이 유일하게 살만한 동네’라는 주민들의 말은 큰 나무들 덕택에 천석꾼이 나고, 인물이 많이 나는 마을이었다는 자랑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는 주민들이 ‘골안’이라고 부르는 계곡이 마을까지 개울을 이루면서 개울가를 따라 큰 나무들이 자리잡고 그 뒤에 집들이 들어섰다는 것이다. 지금은 큰 나무들이 가로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골안을 따라 흐르는 개울이 복개된 곳이라는 설명이다.

마을 안을 조용히 흘러가던 개울과 울창하게 들어선 나무들.   시원한 그늘을 생각하면 상상만 해도 한 번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 날만 한다. 덧붙여 주민들이 자랑하는 마을 생김에 대해서 한 마디 하고 넘어가자.

주민들은 골안을 따라 울창하게 들어선 숲과 어우러진 마을을 하늘에서 내려보면 흡사 우리나라 지도를 떠올리게 한다고 설명한다. 빽빽하게 들어선 숲이 민족의 등줄기인 태백산맥 줄기고, 그 옆으로 펼쳐진 들판은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역인 전라도의 평야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포구나무, 가을 열매에 취하다
   
▲ 상북면 석계리 구소석마을 검포구나무 2006/가을

천연기념물 186호 이팝나무의 단짝이자 마을 주민들에게 한 가지씩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검포구나무(검은 포구나무라는 뜻으로 마을 주민들이 줄여 부르는 말)는 주민들에 따르면 벌써 400년도 넘게 마을과 함께 살아왔다고 한다.

골안을 넘어 길게 늘어뜨린 가지는 이팝나무와 함께 마을 사람들에게 쉼터를 주며 시원한 계곡소리와 함께 더운 여름을 이겨내는 힘을 주었다.

봄에는 이팝나무에서 피는 꽃향기가, 가을에는 포구나무에 새까맣게 열리는 열매가 마을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이제 이팝나무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검포구나무 홀로 늦가을에 접어들면 달싸름한 맛을 내는 포구나무 열매를 맺고 있다.

먹을 거리가 귀하던 시절, 동네 개구쟁이들은 포구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를 따기 위해 모여들었고 가지 위를 따라 오르던 아이들에 호통을 치던 호랑이 할아버지들은 행여 아이들이 나무에서 떨어질 것을 염려하던 마음을 뒤로 감추고 나무에게 해코지 한다며 가래를 들고 쫓아오기도 했다.

구소석 마을에는 누구나 큰 나무에 얽힌 어린 시절 추억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세월이 흘러 굳이 포구나무 열매를 따먹기 위해 나무를 오르는 개구쟁이들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스한 추억을 전해주고 있다. 이런 소중한 기억이 아직도 큰 나무들을 소중히 가꾸며 마을을 지켜가는 사람들의 힘이 되고 있다.

신라시대에 쌓아졌다는 마을 어귀에 놓인 석탑은 그 유래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단순한 돌무더기가 아닌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상징물로 소중히 다루는 구소석 사람들. 옛것이 바로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 주는 힘이라는 진실을 몸으로 느끼고 실천하는 소박한 이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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