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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시한줄의노트] 봄밤
사회

[시한줄의노트] 봄밤

양산시민신문 기자 234호 입력 2008/06/03 14:23 수정 2008.06.03 01:21

가난도 지나고 보면 즐거운 친구라고
 
↑↑ 김순아 / 시인
한국문인협회양산지부 회원
ⓒ 양산시민신문 

배춧국 김 오르는 양은그릇들이 날을 부딪치며 속삭인다
쌀과 채소가 내 안에 타올라 목숨이 되는 것을
나무의 무언(無言)으로는 전할 수 없어 시로 써보는 봄밤
어느 집 눈썹 여린 처녀가 삼십 촉 전등 아래
이별이 긴 소설을 읽는가보다

땅 위에는 내가 아는 이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서까래 아래 제 이름 가꾸듯 제 아이를 다독여 잠재운다
여기에 우리는 한 生을 살러 왔다

누가 푸른 밤이면 오리나무 숲에서 비둘기를 울리는지
동정 다는 아낙의 바느질 소리에 비둘기 울음이 기워지는 봄밤
잊혀지지 않은 것들은 모두 슬픈 빛깔을 띠고 있다

숟가락으로 되질해온 생이 나이테 없어
이제 제 나이 헤는 것도 형벌인 세월 낫에
잘린 봄풀이 작년의 그루터기 위에
또 푸르게 돋는다
여기에 우리는 잠시 주소를 적어두려 왔다

어느 집인들 한 오리 근심 없는 집이 있으랴
군불 때는 연기들은 한 가정의 고통을 태우며 타오르고
근심이 쌓여 추녀가 낮아지는 집들
여기에 우리는 한줌의 삶을 기탁하러 왔다
<이기철>


봄밤의 정경과 어우러지는 잔잔한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시입니다. 곳곳에 보이는 서정적 비유도 돋보이지만 <우리는~왔다>로 맺음 되는 통찰이 강한 인상을 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천근 무게로 느껴질 때, 이 시가 왠지 연민의 심정으로 삶을 이해하게끔 하는 것만 같습니다.



이기철 시인----------------------
1943년 경남 출생. 영남대 졸업. 『자유시』 동인. 1972 『현대문학』에 「5월에 들른 고향」 등이 추천되어 등단. 주요 저서 -시집 『낱말 추적』중외출판사, 1974. / 시집 『청산행(靑山行)』, 민음사, 1982.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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