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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고] 민족무예 택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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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고] 민족무예 택견의 역사

양산시민신문 기자 249호 입력 2008/09/30 13:42 수정 2008.09.30 01:40

ⓒ 양산시민신문
김종인
경남 택견연합회 자문의원
민족무예 택견 연구가


모든 동물은 종족 보존의 본능에 의해 동류를 죽이는 일은 하지 않는다. 초기 원시인들도 노동력과 번식력을 상실하는 인명살상의 행위는 피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무기를 사용하여 동족을 상해하는 대신 맨손으로 싸우는 격투가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격투 습속은 제의성과 유희성이 가미 되면서 중세에까지 남아 있었고 오늘날은 격기 종목의 스포츠로 변모하였다. 한편 동양에서는 근세에 와서 각종 격투기가 인간의 심신을 함양시키는 수양법의 형태로 발전 하였고 여기에 정치성과 종교성, 상업성이 결부되어 관념적 형태가 부가 되었다.
 
문화의 전통성을 논하는 데는 무엇보다 문헌적 근거가 가장 중요하다. 이에 우리 민족의 맨손 격투기에 대한 기록을 보면 고려사 충혜왕 3년5월 '왕이 상춘정에 나가 수박희를 구경하였다', 동사강목에 '왕이 직접 수박희를 하였다', '의민이 주먹으로 기둥을 쳐서 서까래를 움직이고 두경승이 주먹으로 벽을 치니 주먹이 벽에 파묻혔더라' 라는 기록이 있다.
 
또 태종실록에 '의흥부에서 군사를 뽑는데 수박희를 시켜 세 사람을 이기는 사람을 방패군으로 삼았다', 세종실록에는 '향리나 관노들이 수박을 잘하는 자를 군사로 뽑아 쓴다는 말을 듣고 모여 서로 다투어 수박희를 하였다'등의 기록들이 있다.
 
위의 기록으로 봐서 우리 선조들의 맨손 무예 명칭이 '수박'또는 '수박희'로 불리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택견의 기록을 살펴보면 재물보(조선정조. 이성지)에 '변, 수박을 변이라 하고 힘을 겨룸을 무라 하는데 지금의 탁견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근세에 조선시대 마지막 택견꾼인 송덕기(1893~1987)옹의 증언으로는 일제시대에는 일본 순사의 탄압으로 택견을 할 수 없었으며, 해방 후 1958년 이승만 대통령 탄신기념 경찰 무도대회에서 경무대 요청으로 송덕기가 택견 시연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현세에 알려졌고 이를 전수받은 신한승(1928~1987)의 노력으로 1983년 무예로는 유일하게 중요무형문화재 76호로 지정받게 되었다.
 
현재는 전국 생활체육으로 활성화되어 있으며 2007년에는 대한 체육회에 정식종목으로 가맹되었다. 또한 이미 수십 개국에 택견 단체가 설립되어 활약 중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 문화 자산인 택견이 문화재로 보존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급속도로 발전하는 것을 볼 때 택견을 연구하는 한사람으로 가슴 뿌듯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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