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매년 3월이면 베이징은 정치의 계절이 된다. 이른바 양회(兩會) 즉 정치협상회의와 전국인민대표대회가 개최되기 때문이다. 2009년 회의도 예정대로 3월 첫 주에 개회되어, 주로 경제와 민생 관련 이슈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예년보다 빨리 두 번째 주에 폐회했다.
13억명이 넘는 인구를 대표하려면 국회의원이 몇 명쯤 돼야 적정할까. 4천900만 인구에 299명의 의원이 있는 우리의 경우대로 한다면 8천명쯤 되어야 할 듯하고, 3억 명 인구에 상ㆍ하원 합해 535명의 의원이 있는 미국과 비교하면 2천500명이면 충분할 듯하다. 나라마다 제각금 대표 선출 방식과 규정이 있지만, 아무튼 중국은 국회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의 의원 수가 3천명은 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 정도면 대표성이 충분한지, 그 많은 사람들이 1년에 한 번 열흘 정도 모여 제대로 국사를 토의할 수나 있는지 궁금하지만 중국 나름의 정치 발전은 비록 더디게라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금년의 전인대에선 경기부양과 실업, 농촌 문제 그리고 국민들의 원성이 높은 공직자 부패 문제 등이 주로 논의되었고, 정치 관련 이슈는 거의 없었다. 물론 세계적 경기 침체가 이유이기도 하지만, 전인대 우방궈 상무위원장이 지난해 일부 자유 지식인들이 공개 제안했던 정치 민주화 요구에 대해 "중국은 다당제나 삼권분립 같은 서구식 제도를 수용할 뜻이 없으며,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아주 직접적으로 천명했기 때문이다.
대개 중국 지도자들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 발언할 때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인데, 다당제 같은 정치 민주화 요구에 대해선 매우 단호한 입장을 나타낸 것이다.
중국의 정치적 봄날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흔히 '경제 성장과 정치 민주화의 친화성'이란 모형을 중국의 경우에도 적용하고 싶어 한다. 이 모형은 경제적 성장의 결과 상당한 정도의 중산층이 형성되면 더 많은 정치적 자유와 참여를 요구하게 된다는 내용인데,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압축적 고도 성장을 했던 한국과 타이완 그리고 싱가포르의 케이스를 연구한 결과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 나라들의 경우 경제 성장 과정에서 국가가 친기업 반시민사회 정책을 폈었지만, 이른바 성장 위주의 개발독재가 두터운 중산층을 만들게 되면서 그동안 눌려 있던 시민사회가 정치 다원화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나라들 마다 민주화 과정이 다르긴 하지만 한국의 경우에서 보듯 1987년 6월 항쟁처럼 폭발적인 모습을 보이기 마련이고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중국은 30년 동안의 개혁개방 결과, 2008년에 드디어 1인당 소득이 3천달러(3천258달러)를 넘었다. 환율 덕도 있지만 아무튼 총 GDP도 4조 3천억달러로 세계 3위이다. 지역간의 격차가 심하긴 하지만 상하이나 선전 같은 동남부 연안 지역엔 이미 2억 명에 가까운 중산층이 형성되어 있다. 이 정도라면 중국도 '경제 성장과 정치 민주화의 친화성'을 얘기할 대목이 아닌가 하고 중국 연구자들이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참 조심스럽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모형을 당장 중국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우선, 개발독재의 주역인 중국 공산당이 그런 흐름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전인대를 통해 정치 다원화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지금 중국의 체제인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정치 사회적 안정 기조 위에 지속적 경제 성장'을 추구한다. 경제적으론 자본주의를 심화하고 있지만 정치적으론 안정을 깨뜨릴 그 어떤 급진적 변화도 통제하겠다는 뜻이다.
중국은 여전히 공산당이 강하고, 그를 견제할 대체 세력도 없다. 다음,중산층 자신도 불안한 변화 보다는 답답한 안정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질서 강박 관념(Order Complex)'이라고 부르는데, 중국은 지도부와 중산층 모두 난리가 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미이다.
사실 중국의 앞날을 예측하기는 정말 어렵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시장경제란 체제를 30년 동안 실시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어떻게 될지 비교할만한 대상이 없다. 중국은 지금껏 전대미문의 길을 걸어왔고, 이후 어떨지 또한 중국만이 답을 줄 수 있다. 그러니만큼 모델링의 유용성과 한계를 두루 고려해야만 한다. '경제 성장과 정치 민주화의 친화성'이란 모델은 인지상정이니 예외가 없다고 할 수도 있고, 한편 중국은 지금껏 경험 못한 새로운 길을 가고 있으니 더 두고 보자고 할 수도 있다.
단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중국은 20세기에 혁명을 두 번이나 경험했던 나라라는 사실이다. 2009년 현재 강력하고 유능한 정부 덕에 정치사회적으로 안정되어 있어 보이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잠복해 있는 치명적인 문제들이 수두룩하다. 과연 언제 어떤 식으로 중국인들의 정치적 욕구가 분출될지 조심스레 지켜볼 따름이다. 금년에도 자유 인사들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한숨짓겠지만 베이징의 정치적 봄날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