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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호 영산대학교 일어학과 교수 영산대학교 글로벌사회연구원장 | |
ⓒ 양산시민신문 |
발표회 첫 번째 발표로, 한일민족문제학회 소속의 필자가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자 공탁금에 대한 한국정부의 지원 현황"을 주제로 하여, 2008년 9월부터 2009년 6월까지 관련 피해자의 접수 상황과 관련 위원회의 주요 정책결정 사항을 보고했다. 2
007년 11월에 국회를 통과하여 12월에 공포된 지원 관련 법률에 근거하여, 한국정부는 공탁 금액 1엔(円)당 2천원의 비율로 하여 현재 피해자들에게 지원금을 지급하고 있다. 2009년 6월 말까지 총 1만334건이 접수된 가운데 현재 4천280건이 처리되었으며 그 중에 3천763건이 지급 결정되었다. 지급 금액으로 보면 총 142억원이 처리되어, 평균 미수금 피해자 1인당 377만원 가량이 지급된 셈이다.
현재까지 미수금 지원 지급 대상자로 결정된 피해자는 공탁 근거 자료를 제출한 군인과 군속 피해자에 한정되어 있고, 노무자는 한 명도 없다. 몇 차례 일본정부측에 노무자 공탁 확인을 요청하고 있지만 아직 회답이 없으며 조만간 회답이 오는 대로 노무자에 대한 지원도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발표 후 토론 과정에서 사할린 피해자 등에 대한 지원 여부와 미수금 피해자 총수를 묻는 질의 등이 나왔다. 반면에 필자는 일본의 연구자들에게 피해 노무자와 관련된 자료들을 한국의 관련 위원회에 적극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다.
두 번째 발표로는 재일조선인운동사연구회 관동지부 소속의 미야모토 연구자가 "점령기 일본정부의 재일조선인 대책"을 주제로 하여, 외무성 소장 자료를 활용하여 1948년 중반부터 1949년 초반까지 재일코리안의 국적 문제에 대해 외무성 조약국 내부에서 어떠한 논의들이 있었는지를 밝혔다.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 새로운 국가가 성립되어감에 따라 일본 정부 내에서 관련 정책결정자들이 종래의 애매한 재일코리안 대책 방침에서 국적을 명확하게 하는 방향으로 검토하게 되었다. 검토 과정에서 한국(조선) 국적이나 일본 국적으로 확정하는 방안, 재일코리안에게 국적 선택권을 인정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었다.
특히 이번 발표에서 1948년 11월 단계에 신생 국가 성립에 따른 재일코리안의 '조선 국적 회복 논리가 등장했고 일본 국적 희망자에 대한 선별 방침을 검토한 것을 밝힌 것이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비준과 함께 재일코리안에 대한 '일본 국적 박탈 조치로 이어지는 정책의 원형이 이 시기에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발표로는 재일조선인운동사연구회 관서지부 소속의 다케우치 연구자가 "미쓰이(三井) 재벌과 조선인 강제연행"을 주제로 하여, 대동아전쟁 시기 미쓰이 계열 기업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무자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설명하는 한편, 미이케(三池)탄광을 개별 사례로 하여 강제연행의 실태를 밝혔다. 일본 석탄통제회의 통계 자료에 의하면 1944년 10월 시기에 미쓰이 계열 탄광에만 조선인 노무자가 총 3만3천명 가량 노역을 담당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실제로 얼마만큼의 조선인 노무자가 동원되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다. 다만 종래의 연구 결과 이 시기 일본 전국의 탄광에 강제동원된 노무자 수가 노역을 하고 있던 재직자 수의 두 배에 달했다고 하는 점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6만명 이상의 조선인 노무자가 미쓰이 계열 탄광에 동원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다케우치 연구자는 탄광 뿐 아니라 미쓰이 계열의 일본제강이나 미쓰이 조선(造船) 등에도 수많은 조선인 노무자가 동원되었다고 하는 점을 부연하고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참고 자료들을 소개했다.
한편 고베에 거주하는 김경해(金慶海) 연구자는 KCC 건물 10층 회의실에서 전시 고베항 강제동원 조선인의 자료와 통계에 관하여 발표했다. 그는 1946년에 일본 후생성이 작성한 '조선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의 건을 주된 자료로 하여, 전시기 고베항 부근에 위치해 있던 미쓰비시(三菱)중공업 조선소 등 15개 작업소에 약 5천300명의 조선인 노무자가 강제동원되어 근무했으며 이 가운데 20명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다고 하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고베의 도후쿠사(東福寺)에 60건 정도 조선인 노무자 유골이 있는데 이들의 사업장을 알 수 없다고 하는 점 등을 들어, 후생성 자료에 나타나지 않은 수많은 조선인 피동원 노무자들이 더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