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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시민신문 |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을 극복하고 양산시를 책임지는 시장이 되기까지 그의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시장 당선 이후에도 어려웠던 어린 시절부터 이어지는 특유의 추진력은 거센 찬반 논란을 부르기도 했지만 오 시장의 추진력이 탁월하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을 정도였다. 시장 재임 시절 늘 화제의 중심에 서 있었던 오 시장은 비극적인 죽음으로 또 한 번 화제의 중심에서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을 마무리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생업 전선으로
평생 모은 재산 대학 설립 추진
오 시장은 1947년 양산 북부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집안 환경은 둘째치더라도 7살 때 부모를 여읜 오 시장은 조부모의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오 시장은 어려운 가정 환경을 스스로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에 생계를 위해 신문 배달, 구두닦이 등 궂은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근면성실하고 이재(理財)에 밝았던 것으로 알려진 오 시장은 5년간 경찰서 사환으로 일해 모은 돈으로 집을 마련했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이후 오 시장은 그릇 장사, 계란 장사 등 갖가지 사업을 시작하며 재산을 모았다.
특히 월남전 파병 이후 군에서 모은 월급을 가지고 시작한 쌀장사는 그의 사업 수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70년대부터 시작한 쌀장사를 통해 그는 전국을 넘나드는 양곡상으로 변신, 이때 모은 돈으로 양산전문대(현 양산대학)를 설립해 어린 시절 배움의 한을 대학 이사장이라는 위치를 통해 풀어냈다.
또한 2006년 부산대에서 명예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올해 2월에는 중ㆍ고ㆍ대학교 명예졸업장을 받는 등 학업에 대한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굴곡 많았던 정치 인생의 길
낙선과 당선…무소속 시장의 꿈
오 시장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1995년 지방선거에서 양산군의회에 입성하면서부터다.
당시 오 시장은 군의회 의원 최고 득표를 기록하며 초대 의장에 올라 성공적인 정치 인생을 시작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역경은 그치지 않았다. 오 시장은 이어진 2, 3대 양산시장에 도전했지만 잇달아 낙선을 거듭했다. 오 시장은 재선 이후 취임 1주년을 맞아 본지와 가진 대담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시기였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힘든 시기 산을 오르며 “바른 정신과 건강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깨우쳤다”며 등산예찬론을 펴기도 했다.
오 시장은 자살을 결심하기 전에도 춘추공원과 어곡동 인근 산을 찾은 것으로 알려져 산을 사랑했던 고인의 발자취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고 있다.
오 시장은 안종길 전 시장의 시장직 상실로 치러진 2004년 보궐선거에서 다시 부활하게 된다. 세 번째 도전 만에 어린 시절 맨 몸으로 시작한 꿈을 현실로 만든 것이다.
3선을 목표로 시정을 펼치던 오 시장은 2006년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뜻밖의 시련을 겪게 된다. 이른 바 ‘서화 로비사건’으로 인해 한나라당을 탈당, 무소속으로 선거를 준비해야 한 것이다.
당시 오 시장은 중앙정부 방문 과정에서 한나라당 경남도당 공천심사위원 국회의원들에게 지역 승려의 서화를 제공해 공천과 관련해 로비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파문이 확산되자 오 시장은 탈당을 결정, 무소속으로 재선에 도전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지역구 의원의 사당화’라며 반발한 지역출신 인사들이 ‘양산시민연합’을 결성, 오 시장 지지를 선언하면서 오 시장은 2위와 전국 최다 표차로 당선되는 기쁨을 맛보게 됐다.
재선에 성공한 오 시장은 이후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며 자신이 생각한 시정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러나 오 시장의 추진력은 또 다른 반발을 낳기도 했다.
특히 재선 이후 의욕 있게 추진한 각종 경관조성사업, 기념물 건립 사업, 도시개발사업 등이 정치적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뚝심으로 밀어부치면서 각종 의혹을 사기도 했다. 오 시장 스스로도 당선 이후 검찰과 국세청 등 주요사정기관의 내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 시장은 이를 말하면서 당당하다는 입장을 거듭 내세워 왔다.
지난 5월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검찰의 내사는 토착비리수사 차원에서 진행돼 왔다. 울산지검 특수부는 상북면 내석리 일대 공업용지 변경과 관련해 오 시장의 개입설을 수사하면서 지난달 27일 오전 10시 30분에 소환 조사를 실시할 예정이었다. 오 시장은 검찰 내사에 관해 자신에게 집중된 의혹이 전혀 사실과 다르다는 입장을 간부공무원과 지인들에게 수차례 강조하기도 했다.
산을 좋아했던 사람
산으로 돌아가다
오 시장은 등산을 좋아했다.
등산예찬론자였던 오 시장은 시정활동에서도 수시로 간부공무원들과 산행을 통해 시정 문제점을 파악하기도 했다.
오 시장은 “산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라며 “그곳에서 시민들과 맺은 약속을 기억하고 시장으로 올바른 마음가짐을 다하는 것이 양산 시정을 이끄는 수장으로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왔다.
또한 오 시장은 “산은 생활이 어려움에 닿았을 때 자신을 돌아보는 매력을 가진 것 같다”며 “많은 선거를 치루면서 실패도 경험했다. 그러던 중 산행을 통해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나를 다스리기 위해 산행을 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 시장은 삶의 마지막 날 춘추공원과 어곡동 인근 산을 둘러보며 마지막 순간을 준비한 것인지도 모른다.
생전 오 시장은 “사람들이 자연을 찾고 싶을 때 늘 자리에 자연이 있어 쉽게 자연을 찾을 수 있듯 내가 산에서 아무런 이해관계없이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자연스런 관계를 맺은 것이 ‘매력적’이라는 말의 속 뜻이 아닌가 싶다. 산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작고 부질없어 보인다. 산 정상은 세상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는 여유를 가지게 한다. 그것이 내가 산을 찾는 이유라면 이유”라고 말했지만 마지막 찾은 산은 그에게 다시 여유를 주지 못한 채 깊은 쉼으로 인도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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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오 시장은 재선에 성공하면서 정치적 인생 최고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른 바 ‘서화로비사건’으로 한나라당을 탈당한 오 시장은 한나라당 공천에 반발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양산시민연합’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면서 정치기반을 확고히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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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시장은 군의회 의원 선거 이전 부터 지역에서 착실하게 쌓아온 ‘서민적 이미지’로 지지자들의 호응을 얻어왔다. 어려운 가정환경을 이겨내고 시장의 꿈을 이룬 오 시장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을 뿐 아니라 친근하고 따뜻한 성품으로 서민들에게 지지를 받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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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부터 잠시라도 쉬지 못하는 성품을 가졌던 오 시장은 늘 공무원들에게 ‘현장행정’을 주문했다. 오 시장의 추진력은 재임 시절 양산의 변화를 가속화했다는 평가와 함께 즉흥적이고 일방적인 업무 추진 방식이라는 반발이 뒤따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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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길
ㆍ생년월일 : 1947년 7월 1일생(62세)
ㆍ출생지 : 경남 양산시 북부동
ㆍ병역 : 육군 만기제대 (월남전 참전)
ㆍ학력 : 양산초등학교 졸업(1959년)
ㆍ학위 : 양산중학교 명예 졸업
양산효암고등학교 명예 졸업
영산대학교 명예행정학사 학위 취득
동아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경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국립 부산대학교 명예경영학박사 학위 취득
ㆍ양산대학 설립 및 초대 이사장 (1989년)
ㆍ2007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인물 선정(헤럴드경제 주관)
ㆍ양산시의회 초대 의장 (1996년)
ㆍ경상남도 시ㆍ군의회 의장협의회 부회장 (1995년)
ㆍ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상임위원) 양산시 협의회 회장 (1996년)
ㆍ경상남도 도정 자문위원 (1986년)
ㆍ제14대 국회의원선거 통일국민당 양산군후보 (1992년)
ㆍ제2ㆍ3대 민선 양산시장선거 후보 (1998년, 2002년)
ㆍ제4대 양산시장 보궐선거 당선(2004년)
ㆍ제5대 양산시장 무소속 당선 (20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