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지 여러 날 지난 그의 집으로
청구서가 온다 책이 온다 전화가 온다
지금은 죽었으므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삐 소리가 나면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반송되지 않는다
눈 없고 발 없는 우편물들이
바퀴로 발을 만들고 우편번호로 눈을 만들어 정확하게 달려온다
받을 사람 없다고 말할 입이 없어서
그냥 쌓인다 누군가가 뜯어봐 주기를 죽도록 기다리면서
무작정 쌓이기만 한다
말을 사정(射精)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혀들은
발육이 잘된 성욕을 참을 수 없어 꾸역꾸역 백지를 채우고
종이들은 제지공장에서 생산되자마자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은 책이 된다 서류양식이 된다
백골징포(白骨徵布)를 징수하던 조직적인 끈기가 글자들을 실어나른다
아무리 많이 쌓여도 반송할 줄 모르는
바보 햇빛과 바보 바람이
한가롭게 우편물 위를 어정거리고 있다
김기택 시인
1957년 경기 안양출생.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불룩한 자루』(현대문학, 2001),『어떻게 기억해냈을까』(문예중앙, 2004),『소』(문학과지성사, 2005) 등이 있다.
언젠가 한 며칠 집을 비우고 여행을 다녀왔을 때, 쌓여 있던 청구서들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면서 울컥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죽은 후에도 찾아올지 모를 끔찍한 청구서들을 확인하는 기분이랄까요. 이 시를 읽다보니 그런 끈질긴 자본주의의 속성을 생각하게 되네요.↑↑ 김순아 / 시인
한국문인협회양산지부 회원ⓒ 양산시민신문
이사하고 몇 달이 지나도 전주인 앞으로 계속 쌓이던 우편물. 반송함에 넣고 넣어도 월말마다 배달되어오던 전주인의 이름. ‘바보 햇빛과 바보 바람’처럼 내가 죽은 후에도 찾아와 어정거릴지도 모를 우편물, ‘받을 사람 없다고 말할 입이 없어서 / 그냥 쌓’이는 그것이 자본주의의 우울한 소묘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