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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렬 영산대학교 부동산 금융학과 교수 | ||
ⓒ 양산시민신문 |
이런 와중에 국정운영에 바라는 국민들의 관심사가 1천명의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형태로 언급되었다. 상위 4개가 추려졌는데 4위부터 살펴보면 이렇다. 4위는 등록금 등 교육비 부담 완화(11.4%), 3위는 전세, 집 값 등 부동산 안정(12.6%), 2위는 기름 값 등 물가안정(24.9%)이 1위는 일자리 창출 등 실업난 해소(33.6%)로 나타났다. 작금의 글로벌 경제위기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결과였다. 경제 여건이 나쁨에 따라 집 값도 따라서 안정되거나 다소 하락하기를 바라는 기대와는 반대로 집 값 불안을 걱정하는 비율이 높은 것이 예외라면 예외일 수 있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영산대학교에서 얼마 전 한나라당의 홍준표 의원에게 명예부동산학박사학위를 수여했다. 학위를 수여받는 자리에서 홍의원은 기념강연을 통해 짧지만 인상적인 말을 했다. 옮기면 이렇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딱 두 가지가 해결되면 큰 불만 없다”, “그 두 가지 중 하나는 ‘내 집’을 갖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새끼’ 잘 되는 것이다” 그 이외의 다른 불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홍의원의 비유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그 만큼 우리나라에서 내 집 문제와 내 자식이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50년대 전쟁 이후 폐허에서 ‘압축성장’을 만들어낸 산업화시대의 역군들인 부모세대라면 누구나 갖는 동병상련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심정적으로 그 말에 동의했다.
이런 이유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언급된 국민들의 의식조사 결과는 시간적, 정황적 상황이 전혀 다른 상태에서 언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홍의원이 강조한 두 가지와 맥을 같이 한다. 결국 ‘집’과 ‘취업’ 문제만큼 우리 근대사에서 현재까지 그리고 부모세대에서부터 자식세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들이다.
정부에서 발표한 바 있는 통계자료에 따르면 2008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실업률은 3.3% 수준이다. 청년실업률은 이보다 3배 수준 높은 9.3%다. OECD 평균 실업률은 6.0%, 청년실업률은 12.6%이다. 우리나라의 실업률이 OECD 수준보다 낮고 대체로 실업률보다 청년실업률이 높다는 것을 전제로 현재의 상황을 수긍한다고 하더라도 내 자식의 미취업을 우려하는 것은 ‘내 집’값이 비싼 우리나라에서 집사는데 들어갈 돈을 비축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취업이기 때문이다. 취업을 통해 알뜰살뜰 모아서 도시에서 내 집을 마련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부모세대가 본인들의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집 마련을 위한 선순환 구조가 취업이라는 기반을 통해 마련되어야 하는데 글로벌 경제위기 등으로 인해 여건이 녹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집, 내 자식 문제는 내 집이 있기 전까지 부모와 자식으로서의 관계가 지속되는 한 끝없는 관심거리다. 영원한 테마다. 그런데 여기에도 변화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변화의 동인은 다름 아닌 우리나라 인구구조로부터 기인할 듯 하다. 고3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는 학령 인구는 2013년부터 그리고 우리나라 전체 인구는 2018년 경부터 감소한다. 엄격히 말하면 ‘내 집’과 관련된 소유를 통한 1가구 1주택 원칙의 주택정책은 앞으로도 강조되겠지만, 인구감소에 따른 주택 수요 감소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속도 조절을 요구할 듯 하다.
베이비 붐의 선두에 선 1955년 생들의 퇴직은 포트폴리오 재구축이라는 차원에서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은 분명하다. 이전과 같이 주택가격이 높게 상승하지 않는다면 굳이 높은 유지비용을 지불하면서 까지 중대형 규모 이상의 주택을 보유하고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생활비의 조달이 필요한 가구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때쯤 되면 영원할 것 같은 ‘내 집’과 ‘내 자식’에 대한 동시대적 테마는 현재의 절박함과는 다른 다소 다른 형태로 변화될 듯 하다.
세월 앞에 장사 없듯이 시간은 우리를 또 다른 현실 앞에 놓아 둘 듯하다. 그때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비록 고민의 깊이만 더해 갈지라도 내 자식이 아닌 ‘자신’을 위해 고민해야 한다. 고령화로 인해 오히려 ‘자식’을 고민했던 시간보다 ‘자신’을 위한 고민의 시간이 길지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