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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사무치게 그리웠던 내 고국아, 사랑한다”..
사회

“사무치게 그리웠던 내 고국아, 사랑한다”

엄아현 기자 coffeehof@ysnews.co.kr 입력 2009/12/29 11:51 수정 2009.12.31 01:16
상북 대석리에 정착한 사할린동포의 삶

양성태 어르신 “70년만에 고국 땅 밟아”



ⓒ 양산시민신문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 등에 업혀 사할린에 있는 아버지를 찾으러 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했어요. 그러고는 70여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거죠”

양성태(77) 어르신은 아버지와 함께 징용으로 끌려가 희생된 강제이주 한인 1세대다. 어렸을 때 건너가 러시아에서 자랐기에 고국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지만, 고향을 그리다 끝내 차디찬 사할린 땅에 묻힌 부모 탓에 한국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절절했다.

사할린 강제이주는 1939년 시작됐다. 당시 사할린(일본명 가라후도)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은 사할린의 풍부한 석탄과 목재를 군수물자로 활용하기 위해 한국인들을 강제이주시켰다. 45년까지 무려 15만명이 부산항 등지에서 배를 타고 사할린으로 끌려갔다. 

양 씨의 아버지 역시 강제 징용으로 사할린 서해안의 나요시 탄광으로 실려갔다. 탄광생활은 너무나 참혹했다.

“추운 날씨에 얇은 옷 하나 나눠주고는 몇 년 씩 그 옷으로 버티도록 만들었어요. 제일 힘든 것이 배고픔이었는데, 탄부들에게 나오는 특별배식을 노장과 노부계 일꾼들이 가로채 먹은 것을 알고 항의하다 아버지는 3년 징역살이까지 했어요. 정말 억울한 일이었죠”

양 씨는 어머니 등에 업혀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강원도 강릉에서 한 달 반을 걸려 부산항에 도착했고 짐짝처럼 배에 실려 무사히 사할린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재회도 잠시 아버지가 또 다른 탄광촌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또 다시 이별을 맞았다.

광복 직후 고국에 다시 돌아오려 했지만 아버지를 기다려야 했기에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사할린에 정착하게 됐고, 이때부터 기나긴 이방인의 삶이 시작됐다.

양 씨는 자동차 운전기사로 근무하다 같은 처지인 사할린동포 권남이(71) 씨를 만나 결혼해 1남 2녀를 낳았다. 배고프고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어 견딜 수 있었다.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나 적십자사의 고국방문단 주선으로 잠시 고향을 찾은 뒤 향수병이 더욱 깊어졌다.

2000년 안산시로 영주귀국하는 수속을 밟았지만 완전히 러시아인으로 길러진 아이들의 반대 때문에 한국행을 접어야만 했다. 9년 후 마지막 노년을 꼭 고국에서 보내야 한다는 신념으로 아이들을 설득해 영주귀국을 선택했다.

“양산에 도착해 대석 주공아파트에 들어서는 순간 비로소 가슴에 피멍으로 남은 사할린의 기억들을 지워버릴 수 있었어요. 찰진 한국쌀로 밥을 지어 먹고, 온수로 목욕을 하고, 온돌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은 행복하다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어요”

양 씨는 진작 한국을 찾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왔으면 고국을 위해 일꾼이 되어 조금이라도 봉사하면서 살았을 텐데. 그래도 이 늙은이의 마음은 항상 혈기왕성한 청년처럼 고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사실만은 꼭 알아줬으면 해요. 정말 그리웠고 정말 사랑하고 있어요. 나의 고향 대한민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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